문자는 살아남았지만 목소리는 사라졌다. 3,000여 년 전 상나라, 곧 은나라 사람들은 거북 껍질과 짐승 뼈에 글자를 새겼다. 오늘날 갑골문자라고 불리는 이 문자는 한자의 가장 이른 형태로 평가되며, 동아시아 문자 문명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글자는 남았어도 그 글자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읽었는지는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뼈에는 획이 남았지만, 입술과 혀가 만든 소리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최근 인공지능, 즉 AI가 이 오래된 수수께끼 앞에 새로운 도구로 등장하고 있다. AI는 갑골문자의 모양을 비교하고, 깨진 갑골 조각을 맞추며, 고대 문헌과 현대 방언 자료를 연결한다. 또 수많은 문자 이미지와 고문헌, 한자음 자료를 동시에 분석해 인간 연구자가 놓치기 쉬운 패턴을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오래된 질문 하나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혹시 한자의 가장 오래된 발음 속에 고대 한국어, 또는 동이족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 [코리안투데이] 갑골문자는 문자 자체는 남았지만 당시의 발음은 사라졌다는 점에서 고대 동아시아 언어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거북 등껍질과 짐승 뼈에 새겨진 기록은 상나라의 제사, 전쟁, 기후, 질병, 왕실 생활을 전하지만, 그 글자를 어떻게 읽었는지는 여전히 복원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문자는 남고, 소리는 사라졌다
갑골문자는 주로 점을 치는 기록에 쓰였다. 상나라 왕은 전쟁에 나설지, 비가 올지, 사냥을 떠날지, 제사를 지낼지, 질병이 나을지 등을 묻고 그 결과를 거북 배딱지나 짐승 뼈에 새겼다. 이 때문에 갑골문은 단순한 문자 자료가 아니라 3,000년 전 국가 운영과 제사, 전쟁, 기후, 질병, 왕실 생활을 담은 고대의 데이터베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갑골문자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정확한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 더 어려운 문제는 의미가 아니라 소리다.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어도,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발음했는지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다.
고대 발음을 복원하는 일은 직접 녹음 자료가 없는 세계를 거꾸로 추적하는 작업이다. 학자들은 갑골문과 금문(金文·청동기에 새긴 문자), 《시경》 같은 고대 운문 자료의 압운(押韻·시에서 같은 소리나 비슷한 소리를 맞추는 방식), 《절운》 같은 운서(韻書·한자의 발음을 정리한 옛 사전), 중국 각 지역 방언, 한국 한자음, 일본 한자음, 베트남 한자음 등을 종합해 고대음을 추정한다.
여기에 주변 언어와의 비교까지 더해지면 작업은 더욱 복잡해진다. 한 글자의 발음을 복원하기 위해 수천 년의 소리 변화와 지역 차이, 차용 경로를 모두 따져야 한다. 그래서 고대 한자음 연구는 문자학, 음운학, 비교언어학, 역사학, 고고학이 함께 만나는 복합적인 분야다.
AI, 갑골문 해독의 새 도구가 되다
바로 이 지점에서 AI의 역할이 커진다. AI는 인간이 평생 읽기 어려운 방대한 자료를 짧은 시간에 비교하고, 글자의 형태 변화와 문맥, 음운 자료를 함께 분석한다. 최근 중국의 연구기관과 IT 기업들은 갑골문 해독에 인공지능 모델을 도입해 미해독 글자의 의미를 추론하고, 깨진 갑골 조각을 디지털 방식으로 이어 붙이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AI가 갑골문 연구에서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글자의 모양을 분석한다. 갑골문자는 같은 글자라도 시대와 새긴 사람, 뼈의 상태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나타난다. AI는 수많은 글자 이미지를 비교해 비슷한 형태를 찾아내고, 같은 계열의 문자일 가능성을 계산한다.
둘째, 문맥을 추론한다. 갑골문은 대체로 점복 기록이기 때문에 일정한 문장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날, 왕이 묻기를, 비가 올 것인가”와 같은 식의 반복 구조가 있다. AI는 앞뒤 글자와 문장 패턴을 분석해 미해독 글자가 인명인지, 지명인지, 제사명인지, 동물명인지 등을 추정할 수 있다.
셋째, 조각을 맞춘다. 오랜 세월 동안 갑골은 깨지고 흩어졌다. 같은 갑골의 일부였던 조각들이 서로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AI는 균열 모양, 새겨진 선의 방향, 뼈의 곡면, 글자의 배열을 비교해 조각들이 원래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디지털 방식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일종의 디지털 접합(컴퓨터 이미지 분석으로 흩어진 유물 조각을 맞추는 작업)이다.
이런 작업은 갑골문 해독 속도를 높일 뿐 아니라 고대 문자를 둘러싼 다양한 가설을 데이터로 검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다. 과거에는 연구자의 직관과 장기간의 문헌 검토에 의존하던 분야가 이제는 데이터 과학과 만나고 있다.
![]() [코리안투데이] AI는 갑골문 연구에서 글자 모양을 비교하고, 깨진 조각을 맞추며, 문맥을 분석하는 새로운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방대한 문자 이미지와 고문헌, 한자음 자료를 동시에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은 고대 문자 해독의 속도와 범위를 크게 넓히고 있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훈’은 뜻인가, 잃어버린 발음인가
흥미로운 점은 AI가 고대 문자 연구를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오래전부터 일부 연구자들이 제기해 온 동이족 어원설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이족 어원설은 상나라 또는 그 이전 동북아시아의 여러 집단이 한자 형성 과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일부 한자음 속에 고대 한국어 또는 동이계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견해다.
여기서 동이족은 고대 중국 문헌에서 동쪽 지역의 여러 집단을 가리킬 때 사용된 넓은 명칭이다. 오늘날의 특정 민족과 곧바로 동일시하기는 어렵지만, 한반도와 만주, 산둥, 요동 일대의 고대 집단과 관련해 자주 논의된다.
이 주장의 핵심은 매우 도발적이다. 우리가 오늘날 한자를 배울 때 ‘뜻’이라고 부르는 한국어 고유어가 사실은 더 오래된 발음의 흔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자는 훈과 음으로 배운다. 훈은 뜻이고, 음은 소리다. 예를 들어 風은 ‘바람 풍’이라고 한다. 여기서 ‘바람’은 뜻이고 ‘풍’은 소리다. 熊은 ‘곰 웅’이다. ‘곰’은 뜻이고 ‘웅’은 소리다. 月은 ‘달 월’이다. ‘달’은 뜻이고 ‘월’은 소리다.
그러나 동이족 어원설은 이 관계가 처음부터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대의 문자 교육 체계 속에서 정리된 결과일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오늘날 ‘뜻’으로 분류되는 바람, 곰, 달, 바다, 물, 불 같은 한국어 고유어가 고대에는 실제 발음의 흔적이었을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주류 학계에서 확정된 정설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 제기 자체는 흥미롭다. 한자라는 거대한 문자 체계가 어느 한 집단의 단독 산물이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여러 집단의 접촉 속에서 형성되었다면, 문자 속에는 다양한 언어의 흔적이 겹겹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 풍’이 던지는 가장 도발적인 질문
가장 자주 언급되는 사례는 風, 곧 ‘바람 풍’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風은 ‘바람’이라는 뜻을 갖고 ‘풍’이라고 읽는다. 그러나 동이족 어원설에서는 오늘날 뜻으로 여겨지는 ‘바람’ 또는 ‘파람’이 고대에는 실제 발음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고대 동이계 집단은 風을 ‘바람’ 또는 ‘파람’에 가까운 소리로 읽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소리가 축약되거나 변형되어 ‘풍’으로 굳어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쉽게 말해 처음에는 ‘파람’ 또는 ‘바람’에 가까운 소리가 있었고, 발음이 짧아지거나 음운 변화(말소리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바뀌는 현상)를 거치면서 ‘프람’, ‘프롬’, ‘붕’ 계열의 소리로 변했으며, 후대 한자음 체계에서는 ‘풍’으로 정리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소리가 비슷해서가 아니다. 바람은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름 붙였을 자연 현상이다. 바람, 물, 불, 해, 달, 산 같은 말은 어떤 언어에서나 매우 깊은 고층 어휘(언어의 오래된 기본 어휘층)에 속한다. 동이족 어원설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한자의 가장 오래된 층위에 등장하는 자연어휘와 한국어 고유어 사이에 반복적인 대응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만으로 보기 어렵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다.
물론 일반적인 중국어 음운학은 風의 발음을 상고음(上古音·고대 중국어의 추정 발음)과 중고음(中古音·수·당대 전후의 중국어 발음 체계) 안에서 설명한다. 이 관점에서는 ‘풍’이라는 한자음이 중국어 음운 체계의 역사적 변화 속에서 한국에 수용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바람→풍’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검토 대상인 가설이다.
그럼에도 ‘바람 풍’은 한자 훈과 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상징적 사례다. 우리가 뜻이라고 배운 말이 혹시 더 오래된 소리의 잔향일 수 있다는 질문은 독자의 상상력을 강하게 자극한다.
![]() [코리안투데이] ‘바람 풍’은 동이족 어원설이 제기하는 대표적 사례다. 오늘날 ‘바람’은 뜻이고 ‘풍’은 소리로 배우지만, 일부 견해는 ‘바람’ 또는 ‘파람’이 고대 발음의 흔적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사례는 한자의 훈과 음의 관계가 단순한 교육 체계인지, 더 오래된 음성 기억인지 묻는 출발점이 된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곰 웅’과 동북아 곰 토템의 기억
두 번째로 주목되는 사례는 熊, 곧 ‘곰 웅’이다. 熊은 한국어에서 ‘곰’이라는 뜻을 가지며 한자음으로는 ‘웅’이라고 읽는다.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곰’이 훈이고 ‘웅’이 음이다. 그러나 동이족 어원설에서는 ‘곰’ 또는 고어형으로 추정되는 ‘고마’, ‘고무’ 계열의 말이 후대의 ‘웅’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주장이 특별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곰이 동북아 고대문화에서 단순한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곰은 토템(특정 집단이 조상이나 수호 상징으로 삼는 동식물 또는 자연물), 시조신화, 산악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어 왔다.
한국의 단군신화에는 곰이 등장한다. 곰은 인간이 되고, 시조의 어머니가 된다. 시베리아와 만주, 한반도 일대의 여러 고대 문화에서도 곰은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일부 연구자들은 熊의 음과 뜻을 단순한 동물 명칭이 아니라 동북아 고대 문화권의 언어적 흔적으로 보려 한다.
동이족 어원설에서는 ‘고마’, ‘고무’, ‘곰’ 같은 말이 시간이 흐르며 ‘움’, ‘웅’ 계열로 축약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한다. 만약 이 관계가 실제로 입증된다면, 熊의 ‘웅’은 단순한 중국어식 발음이 아니라 더 오래된 동북아 언어층과 연결된 소리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신중함이 필요하다. ‘곰’과 ‘웅’이 같은 동물을 가리킨다고 해서 곧바로 같은 어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언어 비교에는 규칙적인 음운 대응, 문헌상 용례, 지리적 확산 경로, 시대적 가능성이 함께 필요하다. 같은 뜻을 가진 말이 우연히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언어가 나중에 같은 의미로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
AI는 이 지점을 검증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곰 관련 고대 문자, 토템 자료, 지명, 신화, 방언, 한자음 자료를 한꺼번에 비교해 이 연결이 우연인지, 반복되는 구조인지 따져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코리안투데이] ‘곰 웅’은 문자와 고대 신화가 만나는 사례로 주목된다. 곰은 동북아 고대문화에서 토템과 시조신화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일부 연구자들은 ‘곰’ 또는 ‘고마·고무’ 계열의 말이 ‘웅’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탐색한다. 다만 이러한 연결은 음운 대응과 문헌 자료를 통해 더 정밀하게 검증되어야 한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달 월’, 하늘의 이름은 누구의 말이었나
세 번째 사례는 月, 곧 ‘달 월’이다. 月은 달을 뜻하고, 한국 한자음으로는 ‘월’이라고 읽는다. 오늘날의 교육 체계에서는 ‘달’은 뜻이고 ‘월’은 소리다. 그러나 동이족 어원설은 여기서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달’이 정말 단순한 뜻풀이일까. 혹시 ‘월’보다 더 오래된 발음의 흔적은 아닐까.
달은 인류가 가장 오래전부터 관찰한 천체다. 달의 차고 기움은 시간과 계절, 농경과 제사의 기준이 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달은 단순한 밤하늘의 물체가 아니라 시간 계산과 제의 질서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따라서 달을 가리키는 말은 어느 언어에서나 깊은 역사층을 가진다.
동이족 어원설은 ‘달’이라는 한국어 고유어가 단순히 月의 뜻을 풀이한 말이 아니라, 고대 동북아 사람들이 사용하던 원초적 음성 기억일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 관점에서는 ‘달’이 고대 원음 또는 고대 동북아 어휘층의 흔적일 수 있으며, ‘월’은 후대 한자음 체계 속에서 굳어진 소리일 수 있다고 본다.
주류 학계에서는 月의 한국 한자음 ‘월’을 중국 중고음 계열에서 들어온 음으로 설명하고, ‘달’은 한국어 고유어 훈으로 본다. 따라서 ‘달→월’이라는 문제 제기는 아직 가설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이 사례는 한자 훈과 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AI 시대에는 이 가설도 더 촘촘하게 검증할 수 있다. 한국어 ‘달’, 고대 일본어, 만주어, 몽골어, 퉁구스계 언어, 중국 방언 속 달 관련 어휘를 대규모로 비교하면 이 단어가 어느 언어권과 더 가까운지, 어떤 지역에서 비슷한 형태가 반복되는지 통계적으로 살필 수 있다.
![]() [코리안투데이] ‘달 월’은 자연어휘와 고대 발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례다. 달은 시간 계산과 농경, 제사, 천문 관찰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어느 언어에서나 깊은 역사층을 가진다. 동이족 어원설은 ‘달’이 단순한 뜻풀이가 아니라 고대 동북아 어휘층의 흔적일 수 있다고 보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월’을 중국 중고음 계열에서 온 한자음으로 설명한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바다·물·불·산, 자연어휘 속 고대의 흔적
동이족 어원설은 ‘바람’, ‘곰’, ‘달’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연을 가리키는 기본 어휘 전반에서 고대 발음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海는 ‘바다 해’다. 한국어에서 ‘바다’는 훈이고 ‘해’는 한자음이다. 일부 견해에서는 ‘바다’ 또는 ‘바달’ 계열의 말이 海의 고대 의미나 음가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水는 ‘물 수’다. 물이라는 고유어와 水의 음이 어떤 방식으로 고대 동북아 언어층에서 만났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火는 ‘불 화’다. 불 역시 인류 문명의 가장 오래된 핵심 어휘다. 山은 ‘산’ 또는 옛말로 ‘뫼’와 연결해 볼 수 있다. 日은 ‘해’ 또는 ‘날’이라는 한국어 고유어와 함께 태양과 날짜 개념을 비교할 수 있다.
이 사례들을 하나로 묶으면 중요한 질문이 드러난다. 한자의 훈으로 남아 있는 한국어 고유어들은 단순한 번역어일까. 아니면 고대 동아시아 언어 접촉의 흔적일까. 만약 ‘바람’, ‘곰’, ‘달’, ‘바다’, ‘물’, ‘불’, ‘산’, ‘해’ 같은 말들이 반복적으로 고대 문자와 관련된 의미망 속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동아시아 고대 언어사의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설을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소리 유사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람’과 ‘풍’, ‘곰’과 ‘웅’, ‘달’과 ‘월’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려면 여러 단어에서 반복되는 규칙적 음운 대응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소리가 특정 환경에서 계속 비슷한 방식으로 바뀌는지 확인해야 한다.
또 갑골문과 금문 같은 고문자 자료에서 해당 글자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살펴야 한다. 고대 지명, 인명, 씨족명과의 관련성도 검토해야 한다. 주변 언어와의 비교도 중요하다. 만주어, 몽골어, 퉁구스계 언어, 고대 일본어, 중국 방언, 베트남 한자음까지 함께 비교해야 한다. 그리고 우연히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들을 걸러낼 통계적 검증도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AI는 매우 유용하다. AI는 수많은 단어와 문자, 발음 자료를 동시에 비교해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 인간 연구자가 직관적으로 “비슷하다”고 느끼는 수준을 넘어, 실제로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지, 어떤 지역과 시대에 집중되는지, 다른 언어와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분석할 수 있다.
![]() [코리안투데이] 바람, 곰, 달뿐 아니라 바다, 물, 불 같은 기본 어휘도 동이족 어원설에서 자주 거론된다. 이들 단어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자연어휘로, 한자의 훈이 단순한 번역어인지 고대 언어 접촉의 흔적인지를 묻는 중요한 단서로 다뤄진다. 그러나 비슷한 소리만으로 어원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반복적인 음운 대응과 통계적 검증이 필요하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AI는 증명자가 아니라 검증자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AI가 신화를 증명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AI는 특정 민족의 주장을 자동으로 승인하는 도구도 아니다. AI는 방대한 자료 속에서 가설을 시험하는 분석 장치에 가깝다.
수천 개의 갑골문자, 수만 건의 고대 용례, 중국 각지의 방언, 한국·일본·베트남 한자음, 고대 운서 자료, 고고학적 지명 자료를 함께 비교함으로써 어떤 가설이 자료와 잘 맞는지, 어떤 가설이 우연한 유사성에 머무는지 살필 수 있다.
AI가 실제로 잘하는 일은 분명하다. 갑골문자의 모양을 자동으로 분류하고, 비슷한 형태의 글자를 찾아내며, 깨진 갑골 조각을 이미지 패턴으로 맞춘다. 문맥상 어떤 글자가 들어가야 자연스러운지 추론하고, 고대 문헌 속 비슷한 용례를 검색한다. 또 한국·중국·일본·베트남 한자음을 비교해 소리 변화의 공통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
예컨대 현대 중국어에서는 사라진 받침 계열이 한국 한자음이나 베트남 한자음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한국어의 ‘국’, ‘법’, ‘학’ 같은 받침 소리는 중고 한자음의 일부 특징을 보존한 예로 자주 언급된다. 이런 자료는 고대 발음의 흔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러나 AI가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AI는 3,000년 전 실제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줄 수 없다. 갑골문자가 특정 민족의 언어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비슷한 소리만으로 어원을 확정할 수도 없다. 결국 AI의 분석 결과는 고고학, 문헌학, 음운학, 역사학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 AI가 아무리 많은 자료를 분석해도 최종 해석은 인간 연구자의 비판적 판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태도는 단정이 아니라 검증이다. “한자는 동이족이 만들었다”거나 “갑골문은 고대 한국어였다”는 식의 결론을 앞세우면 논의는 쉽게 민족주의 논쟁으로 흐를 수 있다. 반대로 모든 가능성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태도 역시 고대 동아시아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다.
더 생산적인 질문은 “한자는 누구의 것인가”가 아니라 “한자는 어떤 집단들의 언어와 문화가 섞여 만들어졌는가”이다.
![]() [코리안투데이] 한자와 갑골문자의 기원은 특정 민족의 단독 소유로 단정하기보다 고대 동아시아의 복합적 교류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황허 유역, 산둥, 요동, 만주, 한반도 북부의 여러 집단은 이동과 접촉을 반복했고, 문자와 제사, 청동기, 언어도 그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한자는 누구의 것인가보다 어떻게 섞였는가
고대 동아시아는 오늘날의 국경선처럼 선명하게 나뉜 세계가 아니었다. 황허 유역, 산둥, 요동, 만주, 한반도 북부, 초원 지대의 여러 집단은 이동하고 교류하며 살았다. 청동기, 제사, 농경, 사냥, 전쟁, 문자는 이런 교류 속에서 형성되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상나라의 문자 체계도 어느 한 집단이 고립된 상태에서 완성한 결과라기보다, 여러 문화와 언어가 접촉하며 만들어 낸 복합적 산물일 수 있다. 한자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기호 체계이고, 그 안에는 정치 권력의 기록뿐 아니라 다양한 생활 세계와 언어 접촉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동이족 어원설이 던지는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뜻’이라고 배운 말들이 사실은 잃어버린 고대 발음의 흔적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람 풍’에서 바람은 뜻이고 풍은 소리라고 배웠다. ‘곰 웅’에서 곰은 뜻이고 웅은 소리라고 배웠다. ‘달 월’에서 달은 뜻이고 월은 소리라고 배웠다. 그러나 만약 이 관계가 후대의 정리라면 어떻게 될까. 바람, 곰, 달 같은 말이 고대 동북아 언어층의 실제 음성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한자는 단순한 중국 문자가 아니라 동아시아 여러 집단의 언어 접촉이 응축된 거대한 음성 화석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아직 검증이 필요한 가설이다. 비슷한 소리만으로 어원을 단정할 수는 없다. 언어의 역사에는 우연한 유사성도 많고, 서로 빌려 쓴 말도 많으며, 같은 뜻을 가진 단어가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AI는 이제 이런 가설을 감정이나 인상비평이 아니라 데이터로 시험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과거에는 연구자 한 명이 평생을 바쳐도 일부 자료만 검토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거대 데이터와 기계학습(컴퓨터가 많은 자료에서 규칙을 스스로 찾아내는 기술)을 통해 훨씬 넓은 범위의 비교가 가능해졌다.
AI가 깨우는 것은 문자만이 아니라 질문이다
AI 시대의 갑골문 연구는 고대 문자를 다시 읽는 작업인 동시에, 동아시아 고대사의 형성 과정을 다시 묻는 작업이다. 風의 ‘바람’, 熊의 ‘곰’, 月의 ‘달’은 단순한 어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들은 문자와 소리, 뜻과 발음, 민족과 문화, 기억과 기록의 경계를 흔드는 질문이다.
이 질문이 언젠가 명확한 답에 도달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AI가 갑골문을 박물관 유리장 속의 죽은 문자로만 남겨두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갑골문자는 3D 스캐너와 이미지 인식, 거대언어모델, 음운 데이터베이스와 만나 다시 읽히고 있다.
문자는 뼈에 새겨져 살아남았고, 소리는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소리를 향한 인간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AI는 그 질문에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바람’은 정말 ‘풍’보다 오래된 소리였을까. ‘곰’은 ‘웅’의 먼 기억일까. ‘달’은 ‘월’ 이전의 이름이었을까. 답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질문은 더욱 선명해졌다.
![]() [코리안투데이] AI가 갑골문 연구에 던지는 가장 큰 의미는 정답을 대신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인공지능은 고대 문자와 한자음의 기원을 둘러싼 다양한 가설을 방대한 데이터로 검증하게 만드는 도구다. ‘바람’은 정말 ‘풍’보다 오래된 소리였는지, ‘곰’은 ‘웅’의 먼 기억인지, ‘달’은 ‘월’ 이전의 이름이었는지를 묻는 질문은 AI 시대에 더욱 정밀해지고 있다.(이미지 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갑골문자와 한자음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동아시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AI가 밝혀내는 미래의 결론은 어느 한 민족의 승리 선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고대 동아시아가 처음부터 다언어적이고 다문화적인 세계였다는 사실을 더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다.
AI가 깨우는 것은 문자만이 아니다. AI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뜻이라고 배운 말들이, 어쩌면 잃어버린 고대의 발음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한자의 기원은 한 민족의 독점적 소유가 아니라, 오래전 동아시아 여러 집단이 함께 남긴 거대한 문화적 기억일 수도 있지 않은가.
THE KOREAN TODAY × WIA CODE
이 기사의 WIA Code
WIA Code 스캐너로 비추면 인터넷 없이 발행 사실과 위·변조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휴대폰 기본 카메라로 찍으면 스캐너 안내 페이지가 열립니다 — 기사 바로 열기
움직이는 코드는 스트림입니다 — WIA Code 스캐너로 약 152초 비추면 기사 전문(사진 포함)이 폰에 저장되어 인터넷 없이도 읽을 수 있습니다.
WIA Code · 코리안투데이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