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가 무너지고 왕이 끌려갔는데도 싸움을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3년을 버틴 사람들의 이야기다.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나당연합군에 항복했습니다. 보통 이 날짜를 백제의 끝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해 9월 무렵부터 백제 땅 곳곳에서 불꽃이 다시 일었습니다. 왕족 복신, 승려 도침, 장수 흑치상지가 주류성과 임존성에 모여 한때 200여 성을 회복했다고 전해집니다. 국가의 공식 기구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한 저항이었습니다.
군대도 왕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이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했을까요? 그리고 왜 이 불꽃은 3년 만에 꺼졌을까요? 제24화는 승리의 기록보다 오히려 그 비극적인 균열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 시대의 풍경
당시 동아시아는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하려는 큰 계획의 일환으로 먼저 백제를 쳤습니다. 신라는 이 힘을 빌려 삼국 경쟁에서 앞서려 했고, 왜(일본)는 오랜 동맹국 백제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660년의 사비성 함락은 한 나라의 패배이자 국제 질서가 뒤바뀌는 시작이었습니다.
660년 9월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부흥군을 일으켰고,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호응했습니다. 661년 초 부흥군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금강 어귀를 막아 당 지원군의 진입을 차단했습니다. 두량윤성(지금의 충남 청양 계봉산성 추정)에서는 신라군과 36일간 싸워 이겼다고 전합니다. 661년 9월에는 왜에 머물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돌아와 왕으로 추대되었고, 부흥군은 비로소 ‘왕이 있는 나라’의 체제를 갖췄습니다.
“왕족 복신이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웅거하여 옛 왕자 풍을 맞아 왕으로 세우고, 당의 군진에 맞섰다.” (사료의 취지를 풀어 옮김)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당 고종의 시대. 백제를 무너뜨린 당은 곧 고구려 원정에 집중했고, 백제 옛 땅에는 웅진도독부를 두어 직접 통치를 시도했습니다.
🗿 유럽/중동
661년 우마이야 칼리프 왕조가 열렸고,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는 663년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이슬람의 팽창 앞에서 비잔틴도 생존 투쟁 중이었습니다.
🌏 기타 지역
왜는 663년 백강에서 대규모 해전에 나섰다가 크게 패한 뒤 방어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같은 무렵 잉글랜드에서는 664년 휫비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미지: 백제 부흥군 거점과 외부 세력의 움직임]
⚔️ 그날의 현장
“산성 위로 해가 기운다. 성벽 아래에는 며칠째 불이 꺼지지 않았고, 성 안에는 농민과 승려, 낙오한 병사가 한데 뒤섞여 있다. 누구도 정식으로 임명받은 군인이 아니었다.”
“승려 도침이 합장을 풀고 성가퀴 앞에 선다. 복신은 말없이 지도 위의 강 어귀를 짚는다. 왜에서 올 왕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상황을 재구성한 장면 묘사)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부흥운동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660년 9월 거병부터 661년 초까지 이어진 ‘확산기’입니다. 흩어진 유민과 지방 세력이 호응하며 주류성과 임존성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661년 9월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체제를 갖춘 ‘정비기’입니다. 셋째는 내분과 붕괴의 시기입니다. 도침은 661~662년 무렵 복신에게 제거되었고, 663년 6월 복신은 풍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흔히 부흥군 와해의 결정적 계기로 평가됩니다.
사료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으로 서술되어 부흥군의 활동이 짧게 흩어져 나옵니다. 사건의 순서와 규모는 《일본서기》와 중국 측 기록(《구당서》 등)을 함께 대조해야 복원됩니다. 고고학적으로는 부안 우금산성에서 대규모 성곽 유구와 ‘복신굴’로 불리는 동굴이 확인되지만, 이곳이 곧 주류성이라는 결정적 물증(명문 등)은 아직 없습니다.
이후의 전개는 빠르게 흘렀습니다. 663년 8월 백강 전투에서 왜의 지원군이 패하고, 9월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부흥운동의 중심이 사라졌습니다.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전합니다. 흑치상지는 663년 무렵 당에 투항했고, 끝까지 임존성을 지킨 지수신은 664년 성이 무너지자 고구려로 떠났습니다. 부흥군에 기댈 외부 지원이 끊기고 지도부가 분열된 것이 겹친 결과였습니다. 이 전투의 상세한 경과는 다음 화에서 다룹니다.
시대
660년 9월~664년
핵심 인물
복신, 도침, 흑치상지, 부여풍, 지수신
핵심 사건
사비성 포위, 풍의 귀국(661년 9월), 지도부 내분
영향
백제 부활 좌절, 동아시아 질서 재편
🔍 학계의 시각
주류성 위치: 부안설
전북 부안 우금산성이 주류성이라는 견해가 최근 가장 주목받습니다. 산성 규모, 주변이 과거 바다였다는 지형 분석, 복신굴과 관련 전승이 근거입니다.
대안적 견해
충남 서천 한산 건지산성설이 오래 유력했으나 2001년 발굴에서 고려 후기 성으로 확인되며 힘을 잃었습니다. 홍성, 연기, 정읍 두승산성 등도 후보로 거론되며 결정적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부흥운동이 주는 첫 번째 교훈은 ‘공동체의 회복력’입니다. 국가 기구가 마비된 뒤에도 지역 사회와 종교 조직, 인적 네트워크가 저항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승려 도침이 지도자로 나선 점이 이를 보여줍니다. 두 번째 교훈은 반대로 ‘지도부 분열의 비용’입니다. 외세의 압박보다 내부의 불신이 더 빨리 조직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이 사건은 보여줍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에서도 임시정부, 의병, 광복군은 서로 다른 노선과 갈등을 안고 있었지만 끝내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백제 부흥군은 그 갈등을 넘지 못했습니다. 위기에 빠진 조직이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합의를 먼저 점검해야 하는 이유를 1,300여 년 전의 기록이 말해줍니다.
| 구분 | 백제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수도 함락 뒤 지방 거점이 저항의 중심, 지도부 내분으로 와해 | 국가 위기 때 사회적 합의와 지휘 체계의 연속성이 핵심 |
| 군사/외교 | 산성 항전과 왜의 지원 요청에 의존 | 동맹과 자주국방을 함께 설계하는 안보 전략 |
| 문화/정신 | 승려와 유민이 함께한 불굴의 항전 정신 | 독립운동 정신과 시민 공동체의 회복력 |
[이미지: 부흥운동의 흐름과 오늘의 연결점]
📚 더 깊이 알아보기
- 부안 우금산성: 1995년부터 여러 차례 발굴이 진행된 산성으로, 복신굴로 전해지는 동굴이 있다.
-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당이 사비성을 점령하고 세운 비석으로, 승자의 시선에서 본 부흥운동을 보여준다.
- 예산 임존성(봉수산성): 흑치상지와 지수신이 거점으로 삼은 성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마지막 보루로 알려져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복신과 도침의 3년은 승리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라가 사라진 자리에서도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함께 서려 했다는 사실은 오늘까지 이어지는 힘입니다.
“성은 무너져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백제의 이름은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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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백제 편 (총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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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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