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뉴턴의 기계론적 우주관을 무너뜨린 양자역학의 탄생기였다면, 21세기의 첨단 물리학은 한층 더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 있다. 우주에 과연 고정불변한 실체(Entity·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본체)가 존재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이다. 그리고 지금, 세계적인 루프양자중력 이론의 대가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교수를 필두로 한 동서양의 최전선 과학자들은 이 질문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고 있다. 우주의 미시 입자들은 독립된 자성(自性·스스로 그러한 고유한 본성)을 지니지 않으며, 오직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순간적인 속성을 드러낸다는 선언이다.
![]() [코리안투데이] 양자역학과 불교의 연기 사상은 세계를 고정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의 그물로 바라본다.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이 선언이 특히 충격적인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현대 물리학 내부의 이론적 정리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2,600년 전 석가모니 붓다가 깨달은 삼법인(제행무상·제법무아·일체개공)과 대승불교 화엄의 중중무진 인드라망(重重無盡 因陀羅網) 세계관과 소름 끼칠 만큼 정교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동서양 학계의 방대한 문헌과 논문을 따라가 보면, 양자역학의 최신 논점은 단지 불교를 연상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핵심 통찰을 현대의 수학적·개념적 언어로 다시 말하고 있는 듯한 장면을 보여준다. 과학이 가장 앞선 곳에서 오래된 지혜와 조우하고 있는 셈이다.
이 거대한 전환의 중심에는 이탈리아 출신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원제인 Helgoland에서, 자신이 정립한 관계론적 양자역학(Relational Quantum Mechanics, RQM·물리량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해석)의 철학적 뿌리가 2세기 인도의 대승불교 사상가 나가르주나(용수)의 『중론』에 있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이 고백은 전 세계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 이론이 고대 불교철학과 정면으로 접속하고 있음을 석학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로벨리는 기사와의 서면 인터뷰 및 최신 물리학 리뷰 논문에서 1925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북해의 외딴섬 헬골란트에서 양자 행렬역학의 실마리를 붙잡았던 순간을 반복해 소환한다. 하이젠베르크가 마주한 미시세계의 진실은 놀라웠다. 전자는 관측되지 않을 때 ‘어디엔가 확정된 상태’로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 확정된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로벨리의 설명을 빌리면, 전자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한 전자가 다른 대상, 곧 측정 장치이든 다른 입자이든 무엇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바로 그 순간에만 위치와 운동량 같은 변수들이 현실화된다. 다시 말해 상호작용이 없는 상태의 전자는 어떠한 물리적 속성도 갖지 않는 공(空)의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25년 과학 전문지 Quanta Magazine 인터뷰에서 이런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전자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한 전자가 다른 대상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바로 그 순간에만 변수들이 현실화된다. 상호작용이 없는 상태의 전자는 어떠한 물리적 속성도 갖지 않는 공의 상태다.” 이 문장은 물리학 언어로 번역된 불교의 핵심 명제를 듣는 듯한 울림을 준다. 관계론적 양자역학은 존재를 실체가 아니라 사건(Event)과 관계(Relation)의 관점에서 재정의한다. 무엇이 ‘있다’는 말은 그것이 홀로 자립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것과 맺는 작용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뜻이 된다.
![]() [코리안투데이] 카를로 로벨리의 관계론적 양자역학과 나가르주나의 공 사상은 존재가 홀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관점에서 만난다.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여기에서 불교의 삼법인이 자연스럽게 호출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모든 형성된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어떤 현상에도 고정된 자아나 실체가 없다는 뜻이며, 일체개공(一切皆空)은 모든 존재가 독립적 본성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용자가 제시한 원문에는 ‘제법무아(諸法無無)’로 표기돼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로 통용된다는 점을 함께 덧붙여 둘 필요가 있다.
이 삼법인을 양자역학의 관계론으로 다시 읽으면, 고정된 속성을 지닌 ‘나’ 혹은 ‘실체’는 없고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찰나적으로 변화하며, 물질적 알갱이 역시 최종 실재가 아니라 관계적 결과물일 뿐 그 기저를 파고들면 독립적인 자성(Svabhāva·자기 안에 스스로 성립하는 본질)은 텅 비어 있다는 결론에 닿는다. 로벨리가 에드하르트 가필드(Jay Garfield) 교수가 번역한 『중론』 주석서를 인용하며 “사물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나가르주나의 통찰은 양자역학이 직면한 역설을 해결할 유일한 열쇠”라고 극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지점에서 논의는 삼법인을 넘어 화엄의 세계관으로 확장된다. 불교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의 오랜 교차 연구는 대승불교의 절정이라 불리는 화엄경 체계에서 더욱 선명한 공명을 발견한다. 화엄의 핵심 우주관인 중중무진 인드라망은 하늘의 신 인드라의 궁전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물에 비유된다. 그물코마다 박힌 수많은 보석은 서로를 끝없이 비추고, 하나의 보석 속에 모든 보석의 모습이 들어 있으며, 전체는 부분 안에, 부분은 전체 안에 스며든다. 이는 단순한 시적 은유가 아니라, 존재가 개별적으로 고립된 점들의 집합이 아니라 무한한 반영과 상호침투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철학적 선언이다.
국내 과학철학 및 물리학계의 권위자로 꼽히는 양형진 고려대 물리공학과 교수는 자신의 저서 《현대물리학으로 풀어본 불교의 세계관》과 여러 대중 강연을 통해 양자역학의 비국소성(Non-locality·서로 멀리 떨어진 두 계가 고전물리학의 직관을 넘어 즉각적인 상관관계를 보이는 성질)과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둘 이상의 입자가 분리된 뒤에도 하나의 통합된 상태처럼 연결되는 현상)이 바로 인드라망의 물리적 실체라고 설명해왔다. 과거 한 번이라도 상호작용을 주고받은 두 입자는 우주 양 끝으로 떨어져 있어도, 한쪽의 상태가 결정되는 순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다른 쪽 입자의 상태도 함께 결정되는 방식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 현상은 빛보다 빠른 정보전달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지만, 고전적 실체관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성의 우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화엄의 직관과 깊이 공명한다.
![]() [코리안투데이] 화엄의 인드라망과 양자 얽힘은 서로 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부분과 전체가 긴밀히 연결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두 전통을 동일시하기보다, 관계와 상호의존이라는 공통된 질문을 살펴보게 한다. 뇌 속 신경 세포(좌측)와 우주 거대 구조(우측)는 모두 그물처럼 유사한 얽힌 모습을 하고 있다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이것은 의상대사의 『법성게』에 나오는 화엄의 정수와도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곧 하나 안에 전체가 있고 전체 안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뜻이다. 양자 얽힘과 비국소성은 이 문장을 종교적 시어가 아니라 현대 물리학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읽게 만든다. 개별 입자는 홀로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전체 상태 속에서만 정의되며, 부분의 성질은 전체와 분리해 완전히 기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대 물리학의 또 다른 개념인 텐서 네트워크(Tensor Network·복잡한 다체 양자상태를 연결 구조로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수학적 도구) 역시 이와 유사한 통찰을 제공한다. 복잡한 양자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텐서 네트워크는 각 격자점들이 선으로 연결되며 전체 계의 정보를 기하학적으로 공유하는 구조를 취한다. 이는 개별 존재의 독립성을 배격하고, 공간 전체가 상호 얽혀 있으며 부분이 전체의 문맥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불교의 법계연기(法界緣起·우주 만법이 서로 의존하며 함께 일어나는 구조)를 시각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물론 텐서 네트워크가 곧바로 화엄경의 수학적 증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관계가 실체보다 앞선다는 점에서는 놀라운 사상적 평행선을 이룬다.
물리학과 불교의 만남은 이제 단순한 비유의 차원을 넘어 학술적 방법론으로 굳어지고 있다. 국내외 주요 학술 논문과 저작,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이 분야는 더 이상 ‘과학이 불교를 닮았다’는 감상적 언급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 인식, 존재, 관계라는 핵심 문제를 동서양의 언어로 교차 해석하는 정밀한 지적 작업으로 정착하고 있다.
카를로 로벨리는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과 여러 인터뷰, 특히 국내 언론의 서평과 해설을 통해 우주는 확정된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관계망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그에게 나가르주나의 공 사상은 단순한 동양철학적 장식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마주한 역설을 풀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사유의 도구다. 나아가 그는 공 사상이 고통과 집착을 완화하는 윤리적 통찰일 뿐 아니라 물리학적 난제를 이해하는 데도 유효한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 [코리안투데이] 양자물리학과 불교철학, 신경과학의 대화는 우주와 자아를 독립된 실체가 아닌 관계와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과학과 불교의 만남은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지적 시도다.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이화여대 명예교수 김성구는 《양자역학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와 관련 평론을 통해 양자역학은 불교의 공과 중도(中道·존재와 비존재, 실체와 허무라는 양극단을 떠난 길)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물리학이라고 해석한다. 관찰 이전에는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관찰 순간 입자가 되는 양자 현상을 불교의 명색(名色·이름과 형상, 곧 인식과 현상이 결합해 성립하는 세계) 작용에 비유하는 설명도 이 맥락에 있다. 이는 세계가 처음부터 단단한 사물의 집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인식과 관계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불교의 오래된 관찰과 맞닿는다.
양형진 교수는 앞서 언급한 저서와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논문들을 통해 현대 물리학의 비국소적 거동과 소립자 붕괴 이론이 화엄경의 중중무진 연기, 그리고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다는 뜻)의 원리를 정확히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아주 작은 것 속에 전체 우주의 질서가 응축되어 있다는 통찰은, 현대 물리학에서 국소적인 계조차 전체 상태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는 인식과 공명한다.
신경과학자 프란시스코 바렐라는 《체화된 마음(The Embodied Mind)》과 다학제 인지과학 논의를 통해 불교의 무아 사상과 인지과학의 접점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는 자아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몸, 뇌, 환경, 인식 작용이 상호 구성한 결과라는 관점을 제시했으며, 특히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자기서사와 자아반추에 깊게 관여하는 뇌 영역들의 연결망) 활동 조절이 ‘나’라는 집착의 허상을 느슨하게 만드는 과정과 연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무아 사상이 형이상학적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인지과학과 뇌과학에서도 검토 가능한 주제임을 시사한다.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면, 현대 과학의 최전선이 물질의 근원을 끈질기게 쪼개고 또 쪼개어 도달한 종착지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텅 빈 공간, 다시 말해 공의 자리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적 실재론은 오랫동안 세계를 단단한 사물들의 집합으로 이해해 왔지만, 양자역학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그 확신은 심각한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다. 반대로 동양의 고대 지혜, 특히 불교는 존재를 실체가 아닌 관계, 독립성이 아닌 연기, 고정성이 아닌 무상으로 읽어내며 현대 물리학자들에게 예상 밖의 나침반을 제공하고 있다.
![]() [코리안투데이] 끝없이 펼쳐진 은하와 연꽃으로 화엄의 연화장 세계해를 형상화한 이미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며 드러난다는 세계관은, 우주를 관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대 양자물리학과 불교 사상의 접점을 떠올리게 한다.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
물론 여기에는 신중함도 필요하다. 양자역학이 곧 불교를 ‘완전히 증명했다’고 단정하는 식의 도식적 결론은 학술적으로는 경계해야 한다. 과학은 경험적 검증과 수학적 모델링의 체계이고, 불교는 해탈과 고통의 소멸을 지향하는 수행과 철학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두 체계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 만나 보여주는 사유의 접점은 무시하기 어렵다. 독립된 실체를 해체하고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 자아를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점, 부분과 전체의 상호침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놀라울 만큼 깊게 공명한다. 그래서 오늘의 질문은 “양자역학이 불교를 증명했는가”보다 “왜 최첨단 과학이 2600년 전의 통찰과 이렇게 정교하게 만나는가”에 가까워진다.
우주는 거대한 기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비추며 끊임없이 직조해 나가는 거대한 관계의 바다라는 인다라망적 화엄의 관점은 이제 철학적 수사가 아니라 물리학과 인지과학, 과학철학이 함께 검토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되고 있다. 우리가 이 연기적 사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고립된 자아라는 착각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다. 타인과 자연, 세계를 지배와 소유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상호의존의 장으로 바라보는 윤리 역시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과학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가 다가서는 것은 더 정교한 기술만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2600년 전 보리수 아래에서 세계의 실상을 먼저 들여다보았던 한 성자의 오래된 미소일 수도 있다.
[코리안투데이=박찬두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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