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발간 100주년을 기념하는 2026년 만해예술제에서 도올 김용옥 선생의 세 번째 특별강연이 지난 6월 20일(토)에 열렸다. 이번 강연은 당초 만해 한용운 선사의 마지막 거처인 심우장에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우천 관계로 선학원 2층 법당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됐다. 궂은 날씨에도 법당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도올의 강연을 통해 만해의 문학과 불교사상, 항일정신을 다시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 [코리안투데이] 도올 김용옥이 강연하고 있는 모습 ⓒ 박찬두 기자 |
이번 만해예술제는 만해 한용운 선사 82주기를 추모하고, 『님의 침묵』 출간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로 마련됐다. 재단법인 선학원은 국가보훈부의 후원을 받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만해학술제, 만해예술제, 만해추모재 등 다양한 추모사업을 봉행하고 있다. 올해 행사는 특히 『님의 침묵』 발간 100주년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원장 법진 스님) 주관으로 열린 만해학술제가 『님의 침묵』을 전문적으로 재조명하는 자리였다면, 만해예술제는 예술의 향기 속에서 대중이 만해의 업적과 작품에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법진 스님은 인사말을 통해 밝혔다.
『님의 침묵』은 1973년 간행된 『만해한용운전집』 제1권 가장 앞부분에 실렸다. 이것만으로도 이 시집이 만해 선사의 저작들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다. 송욱은 ‘시인 한용운의 세계’라는 해제에서 만해와 『님의 침묵』을 두고 “그는 위대한 종교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운동이라는 속세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석학일 뿐만 아니라 대사상가였다. 이 때문에 그는 학자로서의 개성을 3·1운동이라는 열화 속에서 예술가의 개성으로 변화시켜, 마치 용처럼 『님의 침묵』이라는 황금 혹은 여의주를 물고 나올 수 있었다”고 평했다. 이 평가는 『님의 침묵』이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종교적 깨달음, 독립운동의 결기, 사상가적 통찰, 예술적 언어가 하나로 응결된 작품임을 보여준다.
![]() [코리안투데이] 도올 김용옥의 기념 특강 홍보 팜플렛의 표지 모습 ⓒ 박찬두 기자 |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 지광 스님은 만해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이자, 민족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이며, 시대를 밝힌 위대한 문인으로 기렸다. 특히 『님의 침묵』을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아픔과 희망, 그리고 자유를 향한 염원이 담긴 시대의 목소리”로 보았다. 이 말처럼 『님의 침묵』은 개인적 사랑의 노래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빼앗긴 나라의 아픔, 침묵 당한 민족의 슬픔, 자유를 향한 집요한 희망을 품은 시대의 언어다.
도올은 강연을 시작하며 먼저 심우(尋牛)의 뜻을 풀었다. 심우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불교 수행에서 소는 본래 마음, 참된 자아, 불성(佛性. 모든 존재가 지닌 깨달음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소를 찾는다는 것은 밖에서 무엇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의 본래면목(本來面目. 꾸밈과 분별 이전의 참된 자기)을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다. 도올은 이 심우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깨달음은 자기 안의 소를 찾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 [코리안투데이] 십우도 중 입전수수도(사진제공: 조계산 송광사, 승보전 벽화) ⓒ 박찬두 기자 |
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십우도(十牛圖. 소를 찾는 과정을 열 단계로 그린 그림)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纏垂手)다. 입전수수는 번뇌와 고통으로 얽힌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가 손을 드리우고 중생과 함께 살아가는 경지를 뜻한다. 깨달은 사람이 산중에 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장과 거리와 역사 속으로 들어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다. 도올은 만해의 삶이야말로 이 입전수수의 불교적 실천이었다고 보았다.
만해는 1919년 3·1혁명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이후에도 그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선학원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계속했고, 강연을 통해 젊은이들을 교화하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조선불교청년회 총재로 활동했고, 조선불교개혁안을 제시했으며, 조선인을 위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참여했다. 팔만대장경 한글 번역사업, 『님의 침묵』 집필과 출간, 비밀조직 만당 결성, 신간회 활동, 월간잡지 『불교』 편집·발행·기자로서의 헌신, 안심사 한글경전 보각·인출까지 그의 행적은 수행과 저항, 문학과 사회운동이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 [코리안투데이] 양산 홍룡사 해조음 합창단이 축하의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 ⓒ 박찬두 기자 |
도올은 만해의 깨달음이 산중에 갇힌 관념이 아니었다고 보았다. 만해에게 불교는 현실을 떠나는 길이 아니라 현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길이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에 굴복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도 단순한 민족주의적 감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수행자가 역사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 실천이었다. 만해의 불교는 관념의 불교가 아니라 저항의 불교였고, 침묵의 불교가 아니라 행동의 불교였다.
심우장은 이런 만해의 삶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만해는 1933년 심우장으로 이거했다. 당시 그는 일제 경찰의 선학원 탄압, 쇠약해진 몸, 유숙원 여사와의 혼인 등 여러 현실적 조건 속에 놓여 있었다. 심우장을 마련하는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부인 유씨의 소지금 약간과 홍순필, 방응모, 박광, 윤상태, 김적음 스님 등 여러 인연의 도움을 받았지만, 연접된 토지 52평을 부득이 매수하면서 약 300여 원이 부족했다. 결국 홍순필 씨의 주선으로 종로금융조합에서 300원을 차용해야 했다. 심우장은 부유한 은거지가 아니라 가난과 감시와 병약함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만해의 마지막 수행처이자 저항의 거처였다.
![]() [코리안투데이] BTN 남성중창단이 축하의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 ⓒ 박찬두 기자 |
도올은 이 심우장의 의미를 곽암(廓庵)과 십우도의 전통 속에서도 조명했다. 곽암은 대략 1150년 전후 북송 말년에서 남송 초년 사이에 활동한 임제계통의 승려다. 그의 십우도는 원오극근(圜悟克勤, 1068~1135)의 『벽암록』이 나온 직후,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의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들고 참구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선 수행법)이 확립되는 분위기 속에서 출현했다. 당나라 말기에 북종선은 자취를 감췄고, 남종선은 임제선과 조동선으로 나뉘었다. 조동선이 점수(漸修. 점진적 수행)를 강조했다면, 임제선은 화두참구를 통한 돈오(頓悟. 단번에 깨달음)의 성격을 띠었다.
십우도의 첫 단계는 심우다. 곽암의 게송은 구도의 막막함을 이렇게 노래한다. “아득히 덮인 풀 헤치며 소를 찾아보아도, 물 넓고 산은 멀어 길은 점점 깊어만 가네. 몸의 기력이 다하고 마음이 피폐하여 더 찾아볼 생각이 없네. 들리느니 단풍나무 늦매미만 우는구나.” 이 장면은 수행이 낭만적 여정이 아니라 막막하고 고된 길임을 보여준다. 길은 멀고, 산은 깊고, 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막막함이 수행의 시작이다. 만해가 걸은 길도 그러했다. 그가 찾은 소는 자기 마음의 본래면목이었고, 동시에 빼앗긴 조국과 자유였다.
![]() [코리안투데이] 경허 스님의 모습(사진제공: 경허연구소) ⓒ 박찬두 기자 |
도올은 경허(鏡虛)의 선풍도 함께 불러냈다. 경허는 근대 한국선의 거목으로, 형식적 엄숙주의를 넘어선 자유로운 선풍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공양주 보살에게 천자문만 떼도 독경은 식은 죽 먹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배움과 인연이 깊었고, 박 처사 유생 밑에서 유가경전, 『사기』, 『한서』, 『후한서』, 『노자』, 『장자』를 수학했다. 이후 계허 송동욱, 계룡산 동학사 만화 스님을 거쳐 강원의 대교과에 이르는 4단계 교육을 완수했고, 수좌강백이 됐다.
그러나 천안 풍세에서 호열자(虎列刺·콜레라)를 겪으며 죽음의 현실을 목격한 뒤, 그의 삶은 결정적으로 전환됐다. 죽음 앞에서 삶의 갈망이 얼마나 가소로운가를 절감했고, 이 체험은 일종의 중년 위기이자 수행의 대전환이 됐다. 그는 강원을 폐쇄하고 근원적 구도의 길로 들어갔다. 원규라는 사미승과 관련된 일화, “어찌하여 소가 되었는데도 코뚜레 뚫을 곳이 없다고 하는가”라는 화두, 자호 성우(惺牛. 깨어 있는 소), “무사한 사람은 본래 이와 같다”는 말은 경허의 깨달음이 형식 너머의 자유를 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허의 “방하착(放下着)”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방하착은 ‘내려놓아라’라는 뜻이다. 단순히 물건이나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 분별, 체면, 수행자라는 자기 이미지, 옳고 그름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내려놓으라는 선적 요청이다. 경허의 여러 일화는 때로 파격적이다. 탁발을 다니면서 왜 품삯은 받지 않느냐는 물음, 품삯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하는 장면, 천장사 강부자 49재 고사, 만공과 법문과 곡차를 둘러싼 대화, 묘령의 여인과 얽힌 이야기, “인연 없는 중생은 백년을 함께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느니라”는 말은 모두 경허의 반엄숙주의적 선풍을 보여준다. 만공이 “스님은 항상 만인평등을 가르치는데 어찌하여 그렇게 편벽하십니까”라고 묻자, 경허는 “법문이라는 것은 술김에나 할 짓이지, 맨 정신으로는 할 게 못돼”라고 답했다. 이 말은 단순한 기행담이 아니라 언어와 형식으로 진리를 붙들려는 태도 자체를 뒤흔드는 선적 역설이다.
![]() [코리안투데이] 도올 김용옥 기념특강을 홍보하는 팜플렛에 실려 있는 도올의 소개글 ⓒ 박찬두 기자 |
경허는 1884년 12월 8일 천장사에서 득도했고, 법명은 월면(月面)이었다. 이후 삼수, 갑산, 장진 등 북계로 유랑하다가 1912년 4월 25일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했다. 법랍 56세, 세수 64세였다. 그의 마지막을 전하는 시구는 “삼수갑산 긴 골짜기 마을에,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송경허. 고향 천 리에 소식 전할 사람 없으니, 세상 떠난 슬픈 소식 흰 구름에 부치노라”로 남아 있다. 도올은 곽암의 십우도, 경허의 자유로운 선풍, 만해의 항일 실천을 하나의 흐름 속에 놓고 만해의 심우가 단순한 내면 수행이 아니라 역사 속 중생과 함께하는 수행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강연에서 주목받은 대목 중의 하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信)’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었다. 도올은 일반적인 종교적 믿음, 특히 기독교적 믿음과 불교적 믿음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기독교의 믿음이 절대자를 향한 신앙과 의탁의 성격을 갖는다면, 불교의 믿음은 인간의 본성과 불성, 깨달음의 진리에 대한 주체적 확신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올은 불교에서 말하는 믿음을 단순히 belief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확신, 곧 Conviction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코리안투데이] 도올 김용옥 기념특강을 홍보하는 팜플렛 중 약력을 소개하고 있는 부분 ⓒ 박찬두 기자 |
이 확신은 맹신이 아니다. 외부의 절대자에게 자신을 맡기는 의존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는 불성과 진리에 대한 단단한 자각이며, 그 자각을 삶 속에서 밀고 나가는 실천적 힘이다. 도올은 만해의 항일정신도 바로 이 불교적 확신 위에 서 있었다고 보았다. 옥고와 감시, 빈곤 속에서도 독립과 자유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던 만해의 태도는 단순한 정치적 결기만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체득한 확신의 발현이었다. 따라서 만해의 시에서 침묵은 체념이 아니며, 그리움은 감상이 아니며, 님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와 자유를 향한 실천의 부름이다.
도올의 철학적 논변은 원효의 『대승기신론』과 화엄사상으로 이어졌다. 『대승기신론』은 세계를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설명한다. 진여문은 모든 존재의 참된 본질을 가리키고, 생멸문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변화의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나 도올은 진여를 고정불변한 절대 본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절대적 본체라 여겨지는 진여문조차 결코 불멸의 문이 아니며, 진여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기(緣起.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해 생겨나고 변화한다는 불교의 핵심 원리)의 세계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고 설파했다.
이 관점은 만해의 ‘님’을 해석하는 데 결정적이다. 만해의 ‘님’은 하나의 고정된 대상으로 박제될 수 없다. 화엄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모든 개별 존재가 서로 걸림 없이 통하고 융합하는 세계)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를 품고 서로에게 스며든다. 하나가 전체를 품고, 전체가 하나 속에 깃든다. 그러므로 만해의 ‘님’은 애인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고, 중생일 수도 있으며, 삼라만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올은 만해의 ‘님’이 화엄의 세계 속에서 무한히 열려 있다고 설명했다.
![]() [코리안투데이] 만해시 중 “당신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까닭”을 낭송하는 공혜경의 모습 ⓒ 박찬두 기자 |
그러나 도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만해가 살았던 시대적 현실을 정면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만해는 나라를 잃은 식민지 조선의 승려였고, 3·1운동의 민족대표였으며,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이런 삶의 맥락을 고려하면 『님의 침묵』 속 많은 시에서 ‘님’은 조국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고 정당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은 ‘님’을 조국 하나로 좁히자는 말이 아니다. 화엄적으로는 모든 존재가 님이 될 수 있지만, 만해가 마주한 역사 속에서 가장 절박하고 구체적인 님의 얼굴은 조국이었다는 뜻이다.
이 대목은 기존의 교과서식 해석을 넘어선다. 그동안 만해의 ‘님’은 조국, 부처, 연인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방식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도올의 해석은 선택지형 해석을 넘어선다. ‘님’은 화엄적으로 무한히 열려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조국이라는 시대적 정수를 갖는다. 다시 말해 만해의 ‘님’은 보편성과 구체성을 동시에 지닌다. 우주적 존재이면서 식민지 조선의 아픔을 품은 조국이고, 종교적 진리이면서 현실의 자유이며, 내면의 깨달음이면서 민족의 해방이다.
도올은 만해의 문학사적 위상에 대해서도 강하게 말했다. 그는 만해가 발행한 잡지 『유심(唯心)』이야말로 한국 근대문학의 진정한 시작으로 기록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심』은 단순한 잡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불교적 사유와 근대적 자아, 민족적 고통, 문학적 실험이 만나는 장이었다. 『님의 침묵』 역시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한국 근대정신이 시의 언어로 응축된 사건이었다. 도올은 만해의 사상과 시심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에서 문화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단단한 초석이 됐다고 평가했다.
![]() [코리안투데이] 『님의 침묵』의 초간본 모습(사진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박찬두 기자 |
만해의 문학은 하나의 장르 안에 갇히지 않는다. 『님의 침묵』은 연애시처럼 읽히지만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다. 종교시처럼 읽히지만 사찰 안의 언어에 머물지 않는다. 저항시처럼 읽히지만 구호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의 언어로 진리를 말하고, 진리의 언어로 조국을 말하며, 조국의 언어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말한다. 그래서 『님의 침묵』은 100년이 지나도 낡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의미를 불러낸다.
![]() [코리안투데이] 『님의 침묵』의 초간본을 영인하여 무료로 배부한 책의 모습 ⓒ 박찬두 기자 |
이번 기념 특강에서는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 초간본을 양장 하드커버 형태로 영인 출간해 참석자들에게 무료로 배부했다. 이번 영인본은 원본의 역사적 가치와 문학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제작됐으며, 참가자들은 특강과 함께 한국 근대문학의 중요한 유산을 직접 간직하는 뜻깊은 선물도 받았다.
이날 도올의 강연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여든을 앞둔 고령에 다리가 불편해 오랜 시간 서서 강연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는 만해의 기개를 고스란히 담은 열정적인 사자후를 토해냈다. 때로는 유머로 청중을 웃게 했고, 때로는 불교철학의 핵심을 날카롭게 파고들며 법당의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었다. 청중들은 도올의 말 속에서 만해가 과거의 위인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질문을 던지는 현재적 인물임을 확인했다.
![]() [코리안투데이] 기념특강 후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 박찬두 기자 |
이번 강연이 남긴 핵심은 분명하다. 만해를 박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님의 침묵』을 시험 문제의 정답처럼 읽지 말라는 것이다. 만해의 ‘님’을 조국, 부처, 연인 중 하나로만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동시에 만해가 살았던 시대를 지워버린 채 추상적 상징으로만 읽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만해의 ‘님’은 화엄의 사사무애 속에서 무한히 열려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통과할 때 그 시대적 정수는 조국으로 가장 뜨겁게 드러난다.
『님의 침묵』 발간 100년을 맞은 오늘, 만해의 침묵은 여전히 깊다. 그러나 그 침묵은 부재의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는 깊은 음성이다. 만해가 찾은 소는 자기 안의 깨달음이었고, 동시에 잃어버린 나라와 자유였다. 만해가 부른 님은 우주적 진리였고, 동시에 식민지 조선의 조국이었다. 만해가 남긴 확신은 종교적 관념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몸으로 증명한 실천이었다.
도올의 세 번째 만해 강연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웠다. 심우는 자기 마음을 찾는 길이지만, 그 길은 결국 세상 속으로 이어진다. 확신은 마음속 신념에 머물지 않고 행동이 될 때 완성된다. 님은 침묵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만해의 님은 오늘도 조국과 자유, 진리와 인간 존엄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다시 돌아오고 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