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5] 옥새를 담보로 한 병(兵)
2월 · 주인 없는 칼 | 약 3분 읽기

허도의 조서와 밀서가 서주의 서랍 안쪽에 조용히 눕혀지던 그 무렵, 강동(江東)의 청년 한 사람이 북쪽 수춘(壽春)의 문 앞에 말을 세우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손책(孫策), 자는 백부(伯符). 강동의 맹장 손견(孫堅)의 장자였다. 한 해 전 아버지가 유표(劉表)의 화살 아래 잠기고, 수춘의 원술(袁術) 아래에 몸을 기댄 지 한 자락 세월이었다.
원술의 지붕 아래에서 손책은 자기 팔을 접어 두고 긴 날들을 보냈다. 원술은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였다. 구강 태수(九江太守)의 자리를 주겠다 하고도 진기(陳紀)를 봉하였다. 여강 태수(廬江太守)의 자리를 주겠다 하고도 유훈(劉勳)을 봉하였다. 손책의 손에는 한 해가 지나도록 한 조각 땅도 쥐어지지 아니하였다.
자객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소식이 허공으로 번진 저녁이 있었다. 손책이 수춘의 누각 위에서 강동의 하늘 쪽을 바라보다가 눈물을 삼켰다. 곁에 주치(朱治)와 여범(呂範) 두 막장(幕將)이 서 있었다. 주치가 낮게 말을 꺼냈다. “주공. 이 북방의 지붕 아래에서 팔을 접고 사시겠습니까. 강동은 주공의 고향이옵니다. 아버지의 옛 군사가 강동의 성읍 아래에 아직 흩어져 있사옵니다. 강을 건너시옵소서.”
손책이 낮게 되물었다. “강을 건너려면 먼저 병(兵)이 있어야 한다. 병은 어디에서 빌리는가.”
여범이 낮은 계(計)를 꺼내었다. “주공. 주공의 품속에 한 조각 옥새(玉璽)가 있지 아니하옵니까. 아버님께서 낙양의 우물 안쪽에서 꺼내오신 전국새(傳國璽)이옵니다. 원술은 황제의 꿈을 가슴 안쪽에 키우고 있사옵니다. 그 옥새를 원술의 눈앞에 놓아 보이시고, 그것을 담보(質)로 병삼천(兵三千)만을 빌리시옵소서. 강을 건너신 뒤에 옥새를 찾으러 돌아오실 수도 있사옵고, 찾지 아니할 수도 있사옵니다. 강동의 땅을 얻으신 뒤의 결정이옵니다.”

손책의 두 눈이 깊게 젖었다. 품속에 손을 넣었다가 다시 뺐다.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이 그 옥새의 표면에 묻어 있었다. 그 한 조각의 표면을 원술의 탁자 위에 놓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을 원술의 손에 놓는 것과 같은 한 결이었다. 손책이 긴 호흡을 삼킨 뒤에 낮게 답하였다. “담보이지, 증여가 아니다. 병삼천만을 빌려 강을 건너고, 강동을 얻은 뒤에 그 옥새를 다시 이 품속으로 돌려 받겠다. 그리 약속하되, 한 장의 질서(質書)를 함께 쓰자.”
여범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질서의 첫 줄은 제가 쓰겠사옵니다.”
그 밤, 한 장의 질서가 쓰였다. 첫 줄에 이렇게 놓였다. “강동의 손책이 부친의 유물인 전국새 한 조각을 수춘의 원공(袁公)에게 담보로 맡기고, 병삼천과 말오백을 빌려, 강을 건너 강동을 정(定)하고자 하노라. 강동이 정하여진 날, 옥새는 다시 손책의 품속으로 돌아오리라.”
다음 날 아침, 손책이 원술의 앞에 섰다. 품속의 옥새가 탁자 위에 조용히 놓였다. 원술의 두 눈이 깊게 벌어졌다. 황제의 꿈이 그 한 조각의 표면 위에 비친 것이다. 손책이 낮게 말하였다. “공(公)이시여. 이 한 조각을 담보로 병삼천과 말오백을 빌리고자 하옵니다. 강동을 정한 뒤에 이 조각을 되찾으러 돌아오겠사옵니다.”
원술이 긴 침묵 뒤에 낮게 웃었다. “좋다. 이 한 조각이 이 탁자 위에 머무는 동안, 병삼천과 말오백을 내주겠다. 강동의 승패는 자네의 몫이다.” 질서가 두 손을 거쳐 두 사람의 인으로 눌려졌다. 한 조각 옥새가 원술의 탁자 안쪽으로 들어갔다.
손책이 수춘의 문을 나서며 하늘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호흡이 그 품속에서 잠시 떨어져 나간 저녁이었다. 주치와 여범이 그의 양옆에 서 있었다. 병삼천과 말오백이 성 밖에 도열해 있었다. 강동으로 가는 길이 오늘 밤 처음으로 열리고 있었다.
Book 2의 쉰다섯 번째 밤이 수춘의 탁자 위에서 조용히 깊어 가고 있었다. 借兵璽(차병새, 병을 빌리는 옥새)의 세 글자가,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이 한 조각 표면에 묻어 있던 옥새가, 한 장의 질서 위에 탁자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 자리 위에 병삼천과 말오백의 수(數)가 한 장의 숫자로 되돌아 놓이는 호흡의 씨로 심어지고 있었다. Day 54의 밀서가 서랍 안쪽에 눕혀진 그 저녁에, 오늘 밤은 한 옥새가 탁자 위에 눕혀진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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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역가의 한 마디 — 연삼흠 박사
한 사람의 품속에 오래 놓여 있던 한 조각 유물이, 다른 사람의 탁자 위에 담보로 놓이는 저녁이 있지요. 그 한 조각을 내려놓는 순간에,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이 탁자의 자리로 함께 옮겨 앉는 자리이옵니다. 오늘 당신의 품속에도, 담보로 놓아야 할 한 조각 유물이 혹시 놓여 있지는 아니한지요. 그 놓음의 결을 한 번 더 조용히 들여다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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