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5년을 살아낸 나라가 668년 가을, 지도 위에서 이름을 잃었다. 그런데 정말로 사라진 것일까.
서기전 37년 주몽이 졸본에서 나라를 연 순간부터 668년 9월 평양성이 무너지기까지, 고구려는 무려 705년을 버텼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다시 동서로 갈라지는 그 긴 시간 동안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지키며 스물여덟 명의 왕을 거쳤다. 이 시리즈는 그 705년의 시작과 절정과 몰락을 39편에 걸쳐 따라왔다.
오늘은 그 마지막 장을 덮는 자리다. 그러나 역사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부터 확인하게 된다.
◆ 시대의 풍경 – 705년의 대서사시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의 작은 성읍국가로 출발해 4세기 말~5세기 초 광개토왕·장수왕 대에 만주와 한반도 중북부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했다. 6세기 이후 수·당이라는 통일 대제국이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반세기 넘게 이들과 정면으로 맞섰다. 살수대첩(612년)과 안시성 전투(645년)는 그 저항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665년 실권자 연개소문이 죽자 내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맏아들 남생이 동생 남건·남산과 권력을 다투다 당에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넘어갔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이 먼저 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668년 9월, 나당연합군은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시켰고 보장왕과 남건·남산 등 지배층은 포로가 되어 당의 장안으로 압송됐다. 이듬해인 669년 4월에는 고구려 백성 3만 8300여 호가 당나라 강남·회남·산남·경서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705년 왕조의 물리적 종언이었다.
“은택이 하늘에 흡족하였고, 위엄과 무공은 사해에 떨쳤다(恩澤洽于皇天, 威武振被四海).”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668년, 당 고종은 고구려를 흡수하며 동북아 최대 통일제국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 지배는 오래가지 못하고 이 지역은 곧 신라와 발해의 각축장이 된다.
🗿 유럽/중동
같은 668년, 비잔틴 황제 콘스탄스 2세가 시칠리아에서 숨을 거두고 콘스탄티누스 4세가 즉위했다. 신흥 우마이야 칼리프국은 이 해부터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본격화하며 옛 로마의 심장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 한반도
신라는 고구려 멸망 직후 당과의 동맹을 깨고 한반도 내 당군을 몰아내는 전쟁에 돌입한다. 옛 우방이 새로운 적이 되는, 냉정한 세력 재편의 시간이었다.
[이미지: 고구려 건국(BC37)부터 멸망(668)과 발해 건국(698)까지의 705+30년 시간선]
⚔️ 그날의 현장
“668년 9월, 평양성 성벽 위로 연기가 치솟는다. 보장왕은 항복 문서를 앞에 두고 오래도록 붓을 들지 못한다. 성 아래에서는 이미 조카뻘 되는 남생이 당군의 향도가 되어 성문을 가리키고 있다.”
“그로부터 30년 뒤, 만주 동모산 자락. 대조영이라는 이름의 옛 고구려 장수 출신이 유민들과 말갈족을 모아 새 흙벽을 쌓기 시작한다. 그는 훗날 이 나라를 발해라 부르게 될 것을 아직 모른다. 다만 그의 곁에는, 평양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이들의 기억이 함께 있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 멸망 이후의 고구려
고구려의 멸망은 흔히 668년 한 해의 사건으로 요약되지만, 그 여파는 30여 년에 걸쳐 동북아 전체를 재편했다. 검모잠·안승 등이 주도한 고구려 부흥운동이 곧바로 각지에서 일어났고, 당은 고구려 유민을 강남과 요서 등지로 흩어 놓는 방식으로 저항의 구심점을 해체하려 했다.
그러나 698년, 옛 고구려 장수 출신 대조영이 거란의 반란을 틈타 요서를 벗어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서 진국(振國)을 세웠다.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되며 국호를 발해로 바꾼 이 나라는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했고, 이후 한반도 남쪽의 신라와 함께 이른바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고구려는 국가로서는 사라졌지만, 그 유민과 기억은 곧바로 새로운 나라의 뼈대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고구려의 몰락은 외부 침공보다 내부 균열이 더 치명적이었다는 교훈을 남긴다. 수·당 두 제국의 총력전을 반세기 넘게 막아낸 나라가, 지도층의 권력 다툼 앞에서는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이는 이후 동아시아 여러 왕조가 되풀이해서 곱씹게 되는 역사의 경고문이 됐다.
존속 기간
BC 37~AD 668, 705년
역대 왕
주몽~보장왕, 28대
멸망 계기
연개소문 사후 형제 내분
계승 국가
발해(698년 건국)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고구려 멸망은 수·당 장기전에 따른 국력 소모, 흉년 등 경제적 피폐, 지배층 내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시각이 주류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세습 권력구조의 취약성이 결정타였다는 평가가 많다.
대안적 견해
일부 연구자는 발해를 고구려의 실질적 계승국으로 보고 ‘고구려사=668년 종결’이라는 통념 자체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해사를 포함한 ‘대고구려사’적 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고구려가 남긴 가장 뚜렷한 메시지는 ‘작은 나라가 큰 제국과 맞설 수 있다’는 실증이었다. 살수대첩과 안시성의 기억은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안보관·외교관 밑바닥에 깔려 있다. 동시에 고구려의 몰락은 ‘외부의 강함보다 내부의 결속이 우선’이라는 냉정한 반명제도 함께 남겼다.
21세기 한국은 K-방산 수출, 반도체·문화 산업의 세계적 영향력을 통해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오래된 정체성을 다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사가 경고하듯, 그 힘은 언제나 내부의 통합에 달려 있다. 705년의 영광도, 몇 달 만의 몰락도 결국 같은 사람들의 선택에서 비롯됐다.
| 구분 | 고구려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수·당이라는 초강대국과 반세기 대치 | 주변 강대국 사이 균형 외교 |
| 군사/외교 | 산성 방어망, 살수·안시성 승리 | K-방산 수출, 자주국방 강화 |
| 문화/정신 | 상무정신, 다물(多勿) 이념 | K-Culture의 세계적 확산 |
[이미지: 고구려의 산성 방어 정신이 현대 한국의 첨단 산업·문화력으로 이어지는 상징도]
📚 더 깊이 알아보기
- 광개토왕릉비(중국 지린성 지안)와 국내성·환도산성 유적 –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구려 고분군’
- 발해 상경용천부 유적과 정효공주묘 – 고구려 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물증
- 고구려 부흥운동(검모잠·안승)과 보덕국의 짧은 역사 – 잊혀진 저항의 기록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705년 동안 고구려가 증명한 것은 영토의 크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의 크기였다. 그 나라는 668년에 무너졌지만, 그 의지는 발해로,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로 끊이지 않고 흘러왔다.
“성은 무너져도, 기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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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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