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전 18년, 고구려 왕궁에서 밀려난 두 형제가 한강 유역에 도착했다. 이들에겐 땅도, 백성도, 정통성도 없었다. 가진 것은 열 명의 신하와 남쪽으로 계속 내려온 두 다리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낯선 땅에 도착해 처음부터 삶을 다시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을 피해, 혹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국경을 넘는 이들이다. 2,000여 년 전 한강 남쪽 기슭에 정착한 한 무리의 이주민 집단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훗날 700년 가까이 존속하며 삼국 중 하나로 우뚝 설 나라, 백제의 씨앗이 되었다.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이복형제, 정착에 실패한 형, 그리고 끝내 살아남아 나라의 이름까지 바꾼 동생. 백제 건국사는 실패와 재기, 그리고 통합의 이야기다. 왜 온조는 성공했고 형 비류는 실패했을까. 그리고 ‘위례성’은 지금 서울의 어디였을까.
◆ 시대의 풍경
기원전 37년, 부여 출신 주몽(동명성왕)이 압록강 유역 졸본에서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그곳에서 새 부인 소서노 사이에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 시절 낳았던 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찾아와 태자로 책봉되자, 형제는 위기감을 느꼈다. 두 아들은 어머니 소서노, 그리고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형 비류는 서해에 가까운 미추홀(지금의 인천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동생 온조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편히 살기 어려웠다고 한다. 반면 온조가 자리 잡은 한강 유역은 북으로 강을 두르고 남으로 기름진 들판을 낀 천혜의 입지였다. 결국 비류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온조에게 몸을 의탁했다.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비류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오니, 이후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전한)
한 성제(成帝)가 다스리던 전한 후기. 통일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외척 왕씨 가문이 서서히 권력을 장악해가던 시기였다.
🗿 로마(지중해)
바로 이 무렵 로마에서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100년 내전을 끝내고 팍스 로마나 체제를 다지며, 기원전 18년 ‘간통에 관한 율리우스법’을 반포했다.
🌏 한반도·일본
고구려(BC 37)와 신라(BC 57)는 이미 나라꼴을 갖췄고, 마한·진한·변한의 소국들이 한반도 중남부에 자리한 삼한 시대. 일본 열도는 벼농사가 확산되던 야요이 시대였다.
[이미지: 고구려에서 한강 유역까지, 온조와 비류의 남하 경로 개념도]
⚔️ 그날의 현장
“강물은 검푸르렀고 갈대숲은 사람 키를 넘었다. 오간과 마려를 비롯한 열 명의 신하가 부소산 마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북으로는 강이 해자처럼 두르고, 남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졌으며, 서로는 바닷길이 트여 있었다.”
“‘이만한 땅이 없습니다.’ 신하들이 입을 모았다. 온조는 그 자리에 도읍을 정하고 흙을 쌓아 성을 두르라 명했다. 훗날 형 비류의 백성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이 성문 앞에 줄지어 섰을 때, 온조는 그들을 내치지 않고 성안으로 들였다. 나라 이름이 ‘열(十)’에서 ‘백(百)’으로 바뀐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백제 건국 설화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실패한 형’과 ‘성공한 동생’의 대비다. 미추홀은 서해 갯벌에 가까운 저습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위례성은 한강이라는 안정적 수자원과 방어선을 동시에 확보한 입지였다. 정착지를 고르는 실용적 판단 하나가 두 집단의 운명을 갈랐다는 점에서, 백제 건국사는 지리와 생존이 얽힌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시기 한강 유역에서는 대형 토성과 고분, 중국제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초기 백제가 단순한 유이민 집단을 넘어 빠르게 지역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풍납토성에서는 대규모 건물지, 포장도로, 문자가 새겨진 토기와 기와, 해자 등이 확인되어 이곳이 왕성이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다만 온조 당시 백제는 아직 독자적 강국이 아니었다. 한반도 중남부에는 마한이라는 소국 연맹체가 있었고, 그 맹주는 지금의 충남 천안 일대로 추정되는 목지국이었다. 갓 세워진 ‘백제국’은 이 마한 연맹의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로 출발해, 이후 여러 대에 걸쳐 힘을 키우며 서서히 마한 내 주도권을 넓혀갔다.
시대
기원전 18년~서기 28년(온조왕 재위)
핵심 인물
온조왕(시조), 비류(형), 소서노(모후)
핵심 사건
위례성 정착, 십제→백제 국호 변경
영향
한강 유역 지역강국의 출발점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하남 위례성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규모 궁궐 추정 건물지와 경당지구 44호 건물지, 포장도로, 명문 토기·기와, 해자 등 왕성급 유구가 집중적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대안적 견해
인접한 몽촌토성설, 충남 천안 위례산성설을 비롯해 서울 세검정 계곡설, 하남시 춘궁동설 등 총 8가지 학설이 여전히 병존한다. 문헌 기록만으로는 위치를 단정하기 어려워 발굴 성과가 쌓일수록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온조 집단은 기존 질서에서 밀려난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땅에서 좌절하지 않고, 실패한 형의 유민까지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웠다. ‘십제’에서 ‘백제’로 국호를 바꾼 순간은 폐쇄적 혈연공동체가 개방적 통합공동체로 전환된 상징적 장면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 역시 다양한 배경의 이주민과 재외동포, 그리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낯선 분야에 뛰어드는 창업자들로 채워지고 있다. 실패를 딛고 남의 손을 잡아 더 큰 공동체를 이루는 방식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 구분 | 백제 건국기 | 현재 |
|---|---|---|
| 정착/이주 | 고구려 유민의 한강 유역 남하 정착 | 이민자·재외동포의 국내 정착 지원 |
| 외교/생존전략 | 마한 연맹체 안에서 실리를 취하며 성장 | 강대국 사이 균형·실용 외교 |
| 정신/문화 | 개척·통합 정신(십제→백제) | 스타트업·창업 정신, 다문화 통합 |
[이미지: 한강 남쪽에 정착한 이주민 집단이 오늘날 서울의 스카이라인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구성]
📚 더 깊이 알아보기
-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몽촌토성 유적 –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발굴 성과를 상시 전시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 설화 외에 비류를 시조로 보는 이설(異說)도 함께 실려 있다
- 다음 회 예고: 온조 이후 왕들이 마한 내 세력을 어떻게 흡수해갔는지, 고이왕 대의 체제 정비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나라를 세운 것은 화려한 혈통이 아니라, 실패를 끌어안고 다시 걸음을 뗀 사람들이었다. 위례성의 흙담은 사라졌지만, 이방인을 받아들여 ‘백(百)의 나라’를 만든 그 결단은 오늘의 한강변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열 명으로 시작해 백성을 이루었다 – 백제라는 이름 그 자체가 통합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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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백제 편 (총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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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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