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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

[역사는 살아있다 – 백제 편] 제11화: 백제의 미소 – 서산 마애삼존불

기사입력 기사번호 58546
百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백제 편

제11화: 백제의 미소 – 서산 마애삼존불

1,400여 년 전, 한 장인이 가야산 골짜기의 바위 절벽에 웃음을 새겼다. 그 미소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계곡의 ‘인바위’에는 커다란 여래입상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이 새겨져 있다. 세 분 모두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흔히 ‘백제의 미소’라 불린다. 이 표현은 미술사학자 김원용이 《한국미의 탐구》에서 쓰면서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기와 성벽으로 기억되는 앞선 회차와 달리, 이번 회차에서는 백제가 남긴 가장 부드러운 얼굴을 만난다.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잃은 나라(554년)가 어떻게 이토록 온화한 표정을 빚어냈을까? 그리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이 미소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백제 불교 예술의 정수를 따라가 본다.

◆ 시대의 풍경

백제의 불교는 384년 침류왕 때 동진에서 온 호승 마라난타와 함께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백제는 남조 양나라 등 중국 남조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며 불교를 국가 운영의 정신적 기둥으로 삼았다. 538년 성왕이 도읍을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긴 뒤에는 도성 안팎에 사찰과 탑이 늘어섰다. 백제 불교는 6세기 중엽 일본 열도에도 전해졌고, 588년경에는 백제 장인들이 건너가 아스카 지역의 사찰 조영을 도왔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서산 마애삼존불은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위덕왕에서 무왕에 이르는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산 골짜기는 사비 도읍과 서해안을 잇는 길목이었고, 골짜기 안쪽에는 백제 때 세워진 보원사가 있었다(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이 마애불이 중국과 오가던 뱃길, 곧 ‘문화의 통로’를 지키듯 서 있다는 해석이 많다. 이 불상은 1962년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九月 胡僧摩羅難陀自晉至 王迎之致宮內禮敬焉 佛法始於此”
(9월에 호승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오니, 왕이 그를 맞이해 궁궐 안에서 예를 갖추어 공경하였다.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출처: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2 침류왕 원년(384)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618년 당나라가 들어섰다. 불교는 수·당 시대에도 융성했고, 산둥 지역 등의 불상 양식은 백제 조각과 견주어 자주 논의된다.

🗿 유럽/중동

동로마(비잔틴) 제국에서는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하기아 소피아를 완공했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610~641년 재위했다. 서유럽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가 선교사를 잉글랜드로 보냈다.

🌏 기타 지역

일본에서는 아스카 시대에 불교가 자리 잡으며 백제계 장인과 승려가 큰 역할을 했다. 아라비아반도에서는 622년 무함마드가 메디나로 이주했고, 이슬람 세력이 급속히 커졌다.

백제 불교 예술의 길 (개념도)

서해 중국 방면

태안 마애삼존불

서산 마애삼존불

공주 (웅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 미륵사지 석탑

세 걸작 한눈에 서산: 6세기 말~7세기 초경 정림사지 탑: 6~7세기 논쟁 미륵사지 탑: 639년 봉안 ※ 위치는 축척 없는 개념도

[이미지: 백제 불교 예술의 세 걸작 위치 개념도]

⚔️ 그날의 현장

“1959년 4월, 보원사터 유물조사에 나선 홍사준은 지나가던 나무꾼에게 혹시 근처에 불상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무꾼은 부처님이나 탑은 못 봤지만 저 ‘인바위’에 가면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있다고 답했다고 전한다.”

“바위 앞에 선 조사자의 눈앞에, 수백 년 동안 산사람들이 ‘산신령’이라 부르던 웃는 얼굴이 드러났다.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웃음이 깊어졌다 옅어졌다 하는 그 얼굴은, 그렇게 세상에 다시 알려졌다.” (전해지는 발견 일화를 바탕으로 재구성)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① 서산 마애삼존불. 본존인 여래입상은 높이 약 2.8m로, 통통한 얼굴에 초승달 같은 눈썹, 아몬드 모양의 눈, 넓적한 코,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특징이다. 양옆의 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은 본존보다 작게 새겨졌다. 바위 절벽이 앞으로 기울어 있어 비를 어느 정도 피하고, 햇빛의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달라져 보이도록 조각된 것으로 이해된다. 인근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은 좀 더 투박하고 단순해 서산보다 앞선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②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사비 도읍 한복판에 서 있는 이 탑은 좁고 낮은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국보 제9호(1963년 지정)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1층 몸돌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겨 한때 ‘평제탑’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으로 불렸다. 다만 ‘정림사’라는 절 이름은 고려 시대 기와의 “태평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 명문(1028년)에서 확인된 것으로, 백제 당시 절 이름은 확실하지 않다.

③ 익산 미륵사지 석탑. 2009년 1월 서탑 해체 과정에서 심주석 사리공에서 금제 사리호와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이 기록에 따라 639년(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정되었다. 목탑의 구조를 돌로 충실히 옮긴 이 탑은 국보 제11호이며, 정림사지 탑과 함께 백제 석탑의 양대 기준점이다. 1998년 안전진단 이후 해체·복원이 이어져 2019년 4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두 탑은 백제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간 과정을 보여주는 드문 자료이며, 정림사지와 미륵사지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었다.

“彌勒三尊現於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固所願也 王許之”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니,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고 싶다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 출처: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武王) 조 (미륵사 창건 설화, 요지 인용)

시대

6세기 말~7세기 (위덕왕~무왕대)

핵심 유산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84호)

핵심 사건

639년 미륵사 서탑 사리 봉안

영향

한국 석탑의 원류, 한국적 미의 원형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서산 마애불은 6세기 말~7세기 초, 태안 마애불보다 뒤에 조성되었다고 본다. 정림사지 탑은 639년으로 확인된 미륵사지 탑보다 다소 늦거나 비슷한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륵사는 사리봉안기에 따라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발원했다고 본다.

대안적 견해

정림사지 발굴을 맡았던 윤무병은 탑이 판축토와 밀착돼 있다는 점을 근거로 6세기 중엽 사비 천도기에 세워졌다고 보았다. 또한 《삼국유사》의 선화공주 설화를 두고, 무왕에게 왕비가 둘 있었을 가능성 등 사리봉안기와 조화시키려는 해석도 제기된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백제의 미소가 오늘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그 미감이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에 있기 때문이다. 과장 없이 은은하게 번지는 웃음, 인위적인 완벽함보다 살아 있는 표정을 택한 조각가의 선택은 한국 미의식의 뿌리로 자주 거론된다. 이 관점에서 백제의 미소를 오늘날 K-뷰티가 내세우는 ‘자연스러운 광채’와 ‘절제된 아름다움’의 원형으로 읽는 시도는 매력적이다. 다만 이는 두 시대를 잇는 해석일 뿐 사료로 입증된 계보는 아니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보존에서도 드러난다. 미륵사지 석탑은 해체를 결정한 1999년부터 2019년 공개까지 20년 가까이 걸린 작업 끝에 다시 일어섰다. 2009년에 나온 사리봉안기 한 장이 미륵사 창건의 서사를 다시 쓰게 했다. 한 줄의 기록과 한 점의 유물이 역사를 바꾼다는 사실을 오늘도 확인시켜 준다.

구분 백제 시대 현재
정치/외교 불교를 통치 이념이자 국제 교류의 언어로 활용 문화유산·한류를 통한 소프트파워 외교
기술/교류 중국 남조 문화 수용, 백제 장인의 일본 파견 K-콘텐츠·K-뷰티의 세계 진출
문화/정신 꾸미지 않은 온화한 미소, 절제된 조형미 자연스러움과 은은한 광채를 중시하는 미감

백제의 미소에서 오늘의 한국적 미감까지

백제의 미소 6세기 말~7세기 초경

1,400여 년 은은함 자연스러움 절제된 온기

오늘의 한국적 미감 K-뷰티 · K-컬처

※ 두 시대를 잇는 해석은 필자의 관점이며, 사료로 입증된 계보는 아닙니다.

[이미지: 백제의 미소와 오늘날 한국적 미감의 연결]

📚 더 깊이 알아보기

  •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 사리공에서 금제 사리호와 금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사리봉안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라는 취지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 서산 마애삼존불은 오전 무렵 햇빛이 비칠 때 표정이 가장 밝게 보인다고 알려져 있어, 답사객들은 시간대를 골라 찾는다. 다만 시간대별 표정 변화는 관람 경험담에 가깝다.
  • 참고 자료: 국가유산포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립익산박물관 미륵사지 소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백제역사유적지구’.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백제는 성벽이 무너진 뒤에도 돌과 바위에 새긴 미소로 남았다. 정림사지의 단정한 5층 탑, 미륵사지의 웅장한 석탑, 가야산의 웃는 부처는 모두 ‘아름다움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법’을 알았던 나라의 얼굴이다.

“왕조는 660년에 스러졌으나, 백제의 미소는 지금도 바위 위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이전 편

제10화: 관산성 전투 – 성왕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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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왕흥사 – 백제 불교의 중심

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백제 편 (총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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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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