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이 약 62센티미터, 무게 11.8킬로그램의 향로 하나에 산 74개, 사람 16명, 짐승 39마리, 그리고 봉황 한 마리가 들어 있다. 1,400여 년 전 백제의 장인은 작은 금속 기물 안에 하나의 우주를 지었다.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 능산리 옛 절터의 주차장 공사 현장에서 진흙 속에 묻힌 금속 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흙을 털어내자 용이 떠받친 연꽃 몸체와 산봉우리로 가득한 뚜껑, 맨 꼭대기에 날개를 편 봉황이 나타났다. 백제금동대향로다. 1996년 국보로 지정됐고, 2025년 12월에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이 향로만을 위한 전용 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발굴 32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이 향로는 불교 사찰 터에서 나왔는데도 신선이 사는 산과 도교적 짐승들로 가득하다. 부처의 세계와 신선의 세계가 어떻게 한 그릇에 담겼을까. 그리고 이 융합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창의성과 무엇이 다를까.
◆ 시대의 풍경
6세기 중반의 동아시아는 분열과 교류가 겹친 시대였다.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백제는 남조의 양(梁)·진(陳)과 교류하며 불교와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성왕(재위 523~554)은 사비(오늘날의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불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554년 신라와 맞선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뒤를 이은 아들 위덕왕(재위 554~598)은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사비도성 바로 바깥, 나성과 능묘군 사이에 절을 세운 것으로 이해된다. 그 절이 능산리사지다. 절터에서 나온 석조 사리감에는 창왕(위덕왕) 13년, 곧 567년에 공주(公主)가 사리를 봉안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어 절의 창건 연대를 알려 준다. 금동대향로는 바로 이 왕실 발원 사찰의 유물이다.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였으며, 사방 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본떴다.”
신선이 산다는 바다 위 산을 궁궐 연못에 재현했다는 기록이다. 백제 왕실이 신선 사상을 정원과 미술에 적극 활용했다는 문헌상의 증거로, 금동대향로의 ‘신선 세계’가 낯선 외래 취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향로의 원형인 ‘박산로(博山爐)’는 한나라 때 유행한 산 모양 향로다. 백제 향로가 만들어질 무렵 중국은 남북조에서 수(581)·당(618)으로 통일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 유럽/중동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는 537년 하기아 소피아를 완공했다. 같은 세기, 왕실 발원 사찰의 향로에 우주를 담은 백제와 견줄 만한 종교 예술의 전성기였다.
🌏 기타 지역
일본은 아스카 시대로 접어들며 백제를 통해 불교와 공예 기술을 받아들였다. 잉글랜드 서포크의 서턴 후 배 무덤(7세기 초)에서는 금과 석류석 장신구가 나왔다.
[도해: 백제 금동대향로의 구조 – 봉황·산 뚜껑·연꽃 몸체·용 받침 (모식도)]
⚔️ 그날의 현장
“1993년 12월 12일, 부여의 겨울 땅은 얼어 있었다. 주차장 터를 닦던 발굴 현장에서 연구원이 굳은 흙과 진흙을 걷어내자, 물이 고여 있던 나무 수조 안쪽에서 푸르게 녹슨 금속의 굴곡이 드러났다. 조심스레 진흙을 털어내자 연꽃잎과 용의 몸통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향로가 왜 그곳에 묻혔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660년 사비가 함락되던 혼란 속에 절의 사람들이 서둘러 귀중한 기물을 감춘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진흙은 1,300여 년 동안 향로를 지킨 셈이다.”
※ 위 장면은 발굴 경위와 학계의 추정에 근거한 재구성이며, 구체적 대화나 인물 묘사는 담지 않았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향로는 받침, 몸체, 뚜껑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받침은 머리를 치켜든 용이 입으로 몸체를 물어 올리는 형상이고, 몸체는 연꽃잎으로 장식했으며, 뚜껑에는 여러 겹의 산봉우리가 첩첩이 솟아 있다. 산 사이로 냇물이 흐르고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가운데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같은 실제 동물과 상상 속의 동물이 뛰논다. 뚜껑 꼭대기에서는 봉황이 여의주 위에 서 날개를 활짝 펴고, 그 둘레를 다섯 악사와 다섯 마리 새가 에워싼다. 뚜껑 곳곳에는 향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 뚫려 있어, 향을 피우면 산봉우리 사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신선의 산에 구름이 낀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이 형식의 뿌리는 중국 한나라의 박산로다. 바다 위 신선의 산을 본뜬 향로로, 삼신산 신앙과 연결된다. 하지만 백제 향로는 크기와 구성에서 이전의 박산로를 훨씬 넘어선다. 여기에 연꽃과 용, 봉황, 악사가 더해져 불교와 도교, 음양오행 같은 당대의 사유가 한 화면에 엮였다. 다섯 봉우리와 다섯 악사를 오악(五嶽)의, 봉황 아래 새겨진 표현을 삼산(三山)의 상징으로 읽는 해석도 있다.
제작 기술도 놀랍다. 청동으로 주조한 뒤 표면에 금을 입혀 만든 대형 도금 기물로, 전통적인 수은 아말감 도금이 쓰였을 것이라 본다. 수십 가지 형상을 한 기물 안에 정교하게 넣으려면 분할 주조와 세부 가공, 조립 기술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이는 특정 장인 개인의 재주를 넘어, 왕실이 금속 공방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향로가 나온 자리는 공방 터로 추정되는 건물지의 수조 안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관산성 전투의 상처 속에서 왕실이 종교와 예술로 정통성과 위엄을 다시 세우려 한 결과물로 읽을 수 있다.
시대
6세기 후반~7세기 초
핵심 인물
위덕왕(창왕), 성왕, 이름 모를 백제 장인들
핵심 사건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사지 발굴, 1996년 국보 지정
영향
백제 공예의 정수, 동아시아 사상 융합의 실물 증거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567년 창건된 능산리사지 왕실 사찰의 의례에 쓰인 유물이며, 위덕왕 시기를 전후해 제작됐다고 본다. 연꽃 몸체는 불교, 뚜껑은 도교적 신선 세계로, 두 사상이 백제 왕실에서 공존·융합한 증거로 해석한다.
대안적 견해
제작 시기를 7세기 초까지 내려 보는 견해가 있고, 그보다 훨씬 이른 6세기 전반설을 주장하는 재야 학자도 있으나 학계의 인정은 받지 못했다. 또 뚜껑 전체를 도교보다 불교의 이상 세계나 백제 국가의 삼산·오악 관념으로 읽어야 한다는 해석도 맞선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백제의 장인은 불교냐 도교냐를 고르지 않았다. 외래 사상을 있는 그대로 베끼지도 않았다. 한나라의 박산로라는 형식을 빌리되 연꽃과 용, 봉황, 악사를 더해 전혀 새로운 하나의 작품으로 재구성했다. 서로 다른 것을 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든다는 점에서 이는 오늘날 ‘융합’과 ‘창의성’의 원형이다.
오늘 한국 문화가 세계에서 주목받는 힘도 비슷한 곳에서 나온다. 전통 소리를 현대 음악과 섞고, 궁중 복식을 디지털 콘텐츠로 되살리는 시도가 그렇다. 향로를 만든 사람들의 손끝이 요구한 정밀함, 곧 세부까지 타협하지 않는 장인정신은 반도체나 정밀 부품 같은 오늘의 제조 경쟁력과도 통한다. 이 국보가 전용 전시관까지 갖게 된 이유는 그것이 과거의 유물일 뿐 아니라 창의성의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 구분 | 백제 시대 | 현재 |
|---|---|---|
| 정치/외교 | 남조와의 교류로 불교·도교 문물 수용, 왕실이 예술로 위엄을 세움 | 문화유산 외교, 국가유산의 국제 전시와 문화 교류 |
| 기술/산업 | 왕실 공방의 분할 주조와 수은 아말감 도금 | 정밀 주조·소재·부품 산업, 문화재 과학 분석과 3D 복원 |
| 문화/정신 | 불교·도교·음양오행을 한 그릇에 담은 융합 | K-컬처의 장르 융합과 창작 정신 |
[도해: 백제 금동대향로와 현대 한국 – 융합과 장인정신의 계보]
📚 더 깊이 알아보기
- 능산리사지는 나성과 능묘군 사이에 자리한 왕실 사찰터로, 향로와 함께 567년 기록이 새겨진 석조 사리감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부여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라 있다.
- 향로에는 향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 여러 곳 뚫려 있다. 연기가 산봉우리 사이로 피어오르는 모습을 구상한 설계로, 불을 붙였을 때의 시각 효과까지 계산한 것으로 읽힌다.
- 국립부여박물관 향로 전용 전시관(2025년 12월 개관), 국가유산포털의 국보 해설, 학술지 《Journal of Chinese Imperial Art》·《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Art and Archaeology》에 실린 도상 연구를 참고할 만하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한 나라가 전쟁의 상처 속에서도 만들어 낸 것은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였다. 서로 다른 사상을 한 그릇에 담아 낸 백제의 상상력과 끝까지 손을 놓지 않은 장인의 집념은, 융합과 정밀함이 경쟁력인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진흙 속에서 1,300여 년을 기다린 향로는 오늘도 피어오를 연기를 기다리고 있다. 백제의 상상력은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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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백제 편 (총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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