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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 100년 전 오늘

[100년 전 오늘] 1926년 9월 6일 – 한양이 무너지다, 광화문 공사장엔 여전히 벽돌이 쌓였다

기사입력 기사번호 57041
오전판 · 100년 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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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9월 6일 월요일

10시 10분 –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26년 9월 6일 월요일, 경성의 아침이 밝았다. 초가을 볕이 아직 따가웠던 그 무렵, 광화문 앞 총독부 새 청사 공사장에는 이른 시간부터 인부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완공을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공사는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지난 유월 만세 소리로 붙잡혀간 학생들은 여전히 판결을 기다리며 갇혀 있었다. 그리고 이날, 국경 너머 중국 우한에서는 열여섯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한양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날의 경성

광화문 네거리에 들어서는 총독부 새 청사는 이제 외벽 마무리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착공한 지 꼭 십 년, 애초 오 년으로 잡았던 공사 기간은 두 배로 늘어났고 예산도 처음 계획을 훌쩍 넘겼다. 인부들은 매일 아침 벽돌과 석재를 져 날랐고, 시월 초하루로 예정된 낙성식을 앞두고 현장의 손길은 더 바빠졌다.

그 사이 서대문형무소에는 지난 유월 순종의 국장 행렬을 향해 만세를 외쳤던 학생들이 여전히 갇혀 있었다. 이병림, 박하균, 이천진 등을 비롯한 이들은 유월 하순 제령 제칠호와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아직 언도는커녕 첫 공판조차 열리지 못한 채 두 달째 옥중에서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공판은 11월 초로 예정 — 국사편찬위원회 등 기록). 경찰과 검사국은 사건의 배후를 캐겠다며 조사를 계속 넓혀갔고, 초여름 강달영 등 조선공산당 관계자 수십 명을 붙잡아들인 뒤로도 관련자 검거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사상 사건을 다루는 종로경찰서 유치장은 늘 자리가 모자랐다.

경성과 한반도

조선공산당과 그 청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겨눈 검거의 그물은 경성을 넘어 전국으로 뻗어 있었다. 유월 하순 강달영이 붙잡힌 뒤 스무날 만에 마흔아홉 명이 한꺼번에 검거되었고, 그 여파는 지방의 여러 조직에까지 미쳤다(1925년 11월부터 이어진 조선공산당 사건의 네 번째 검거는 이 무렵 마무리 단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문에는 매일같이 누군가 잡혀갔다는 짧은 기사가 실렸지만, 정작 무슨 죄목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대목은 그대로 삭제되거나 복자(覆字)로 채워져, 독자들은 지워진 행간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총독부는 신청사 낙성을 한 달 앞두고 치안의 안정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듯 단속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그럴수록 지방의 청년회와 노동단체들은 몸을 낮추고 움직임을 숨겼다.

그날의 세계

국경 너머 중국에서는 이날 우한 삼진의 한 축인 한양성이 무너졌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북양군벌 우페이푸의 방어선을 뚫고 열여섯 시간에 걸친 공방 끝에 한양을 손에 넣었고, 하루 뒤인 칠일에는 한커우마저 넘어갈 참이었다. 칠월 장사 점령으로 시작된 북벌은 두 달 만에 화중의 요충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편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국제연맹 이사회가 독일의 가입안을 만장일치로 받아들여, 이틀 뒤인 팔일 독일은 상임이사국 자리와 함께 연맹의 정식 회원이 될 예정이었다. 세계대전 패전국이 승전국들과 나란히 앉게 된 셈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신문들은 두 소식을 나란히 짧게 전하며, 저 먼 나라들의 움직임 속에서 조선이 선 자리를 가늠하고 있었다.

경성 24시

새벽녘, 광화문 공사장 인근 하숙집에서 한 인부가 일어났다. 이름은 신문에 남지 않았지만 그 같은 이가 수백이었다. 이른 아침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선 길, 공사장에 닿으면 곧장 벽돌과 목재를 지고 나르는 일이 시작됐다. 한낮에는 늦더위가 남아 등짐을 진 어깨가 땀에 젖었고, 해거름이 되어서야 하루치 삯을 받아 쥐고 골목을 향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살림이라 공사가 언제 끝날지, 그 뒤엔 어디서 일을 구할지 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저녁 국밥집에서는 한양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인부들은 밥 한 술 뜨며 그 소식을 주고받았다. 자신들이 나른 벽돌로 올라가는 건물이 어떤 위세를 뽐낼지는 몰라도, 그들의 하루는 예나 다름없이 똑같은 무게의 짐을 지는 것으로 채워졌다.

100년의 거울

백년 전 경성의 막노동 인부는 정해진 근로시간도, 다치면 기댈 안전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구체적인 품삯 액수는 확인되지 않지만, 생계비에도 못 미쳤다는 기록이 다수 전해진다. 오늘날 건설 현장의 노동자는 노동관계법의 보호를 받고, 일용직이라도 최저임금과 산재보험이 적용된다. 총독부가 십 년을 들여 지은 그 청사는 훗날 정부청사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다 1995년 철거되었지만, 그 벽돌을 나른 이름 없는 손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비교 항목 1926년 2026년
근로시간 정해지지 않음, 해뜰녘~해거름 주 52시간제 적용
품삯 확인 안 됨(생계비 미달 기록 다수) 법정 최저임금 적용
재해 보호 없음 산업재해보상보험

한양이 무너진 다음 날, 한커우의 운명도 결정될 것이었다. 총독부 새 청사는 완공까지 스무나흘, 서대문형무소의 학생들은 여전히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10시 10분, 그다음 하루를 마저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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