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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 100년 전 오늘

[100년 전 오늘] 1926년 8월 14일 – 옥사한 며느리의 유골 찾아, 상주의 형 도쿄로 떠나다

기사입력 기사번호 5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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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판 · 1926년 8월 14일 토요일

100년 전 오늘

10:10 –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26년 8월 14일 토요일, 경상북도 상주. 늦여름 볕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박열의 맏형 박정식은 조카 박형래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향한 곳은 바다 건너 도쿄. 지난달 형무소에서 숨진 제수 가네코 후미코의 뼈를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 같은 시각 경성 거리엔 늦더위가 남아 있었고, 신문 가판대엔 두 달 전 터진 ‘괴사진 사건’의 뒷이야기가 여전히 오르내렸다.

그날의 경성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일본 도치기현 우쓰노미야 여자형무소에서 스물세 살 나이로 눈을 감았다. 총독부와 형무소 측은 목맨 자살이라 발표했지만,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가 남편 박열과 함께 갇힌 것은 1923년, 이른바 ‘대역사건’ 혐의였다. 그런데 1925년 4월, 예심판사 다테마쓰 가이세이의 취조실에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책을 보는 사진 한 장이 찍혔고, 이 사진이 1926년 7월 일본 신문에 폭로되면서 정국이 흔들렸다. 판사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정치 공세는 이듬해 와카쓰키 내각의 총사퇴 요구로까지 번졌다. 그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후미코의 주검이 나왔다. 8월 1일, 경찰은 변호인 후세 다쓰지의 집에 모셔져 있던 유골을 강제로 가져갔다. 유족에게 곧바로 건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상주의 형 박정식이 아들을 데리고 이날 도쿄행을 서두른 이유가 여기 있었다. 제수의 뼈를, 남의 손이 아니라 가족의 손으로 거두고 싶었다.

경성과 한반도

두 달 전인 6월 10일, 순종의 인산 행렬을 따라 학생 2만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그 여진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1926년 한 해에만 전국 55개교가 동맹휴학에 나섰고, 붙잡힌 학생은 서울에서만 210여 명, 전국으로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이야기는 이런 조선 청년들의 귀에도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전해졌다. 일본인이면서 조선인 남편 곁을 끝까지 지킨 후미코, 그리고 조선인 유학생과 3·1운동 관련자를 무료로 변호해 온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두 사람의 존재는 식민 지배라는 벽 너머에도 사람의 양심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총독부 기관지와 달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검열을 의식하면서도 이 소식의 무게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날의 세계

중국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을 이어갔다. 7월 창사를 점령한 뒤 8월에는 후베이 방면으로 진격해 우페이푸 군벌 세력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태평양 건너 멕시코에서는 8월 1일을 기해 가톨릭 성당의 미사가 전면 중단되었고, 사흘 뒤인 8월 3일에는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크리스테로 전쟁’의 서막이었다. 정부의 반성직자 정책에 맞서 신부와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에 나섰다. 도쿄에서는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이 괴사진 사건의 여파 속에 궁지에 몰려 있었다. 서로 다른 대륙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권력과 신념이 부딪치고 있었다.

경성 24시

아침, 신문팔이 소년들이 골목마다 조간을 돌리며 뛰었다. 낮이 되자 경성운동장 주변이 부산해졌다.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배재·중앙·휘문·경신 네 학교의 야구연맹전을 앞두고,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한 팀을 이뤄 몸을 풀었다. 해거름 무렵 종로 거리 서점가에는 후세 다쓰지라는 이름이 나직이 오르내렸다. 그가 조선인들을 위해 벌인 소송과 변론을 알던 이들은 낯선 안도감을 느꼈다. 장바구니를 든 아낙들은 옥양목 값이 떨어졌다는 소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물녘 카페 거리에는 도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늦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매듭지었다.

100년의 거울

100년 전 오늘, 형무소에서 숨진 이의 뼈조차 유족의 손에 곧장 돌아가지 못했다. 경찰이 쥐고, 총독부를 거쳐야만 가족에게 닿을 수 있었다. 변호인의 헌신 없이는 최소한의 존엄조차 지키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늘의 사법 절차는 유족 인도를 원칙으로 삼고, 국선변호인 제도가 최소한의 방어권을 보장한다.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100년 전과는 분명히 다른 자리에 서 있다.

항목 1926년 2026년
주검(유골) 인도 경찰·총독부 경유, 유족 인도 지연 유족 인도 원칙, 법적 절차 보장
변호인 접근 개인 변호사의 헌신에 의존 국선변호 제도화
언론 보도 검열·보안법 기소 위험 언론의 자유 헌법 보장
국적 넘은 연대 드물고 위험을 감수해야 함 국제 인권 네트워크 상존

내일을 기다리며

내일도 상주에서 도쿄로 향하는 형제의 발걸음은 계속됩니다. 뼈 한 줌을 고향 문경 땅에 모시기까지, 아직 갈 길은 멉니다. 내일 아침 10시 10분, 100년 전 오늘의 다음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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