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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 100년 전 오늘

[100년 전 오늘] 1926년 8월 2일 –

기사입력 기사번호 54167

오전판

1926년 8월 2일 월요일

🕙 10시 10분 –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26년 8월 2일 월요일, 경성 거리는 지루한 늦여름 더위 속에 한 주를 열었다. 하루 전인 8월 1일, 오사카의 닛토레코드 스튜디오에서는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생애 마지막이 될 노래 한 곡을 녹음했다. 곡의 이름은 ‘사의 찬미’, 죽음을 찬미한다는 뜻이었다. 이틀 뒤 그는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이날 아침, 그런 결말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의 경성

평양에서 나고 자란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에서 성악을 배우고 돌아와 1923년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로 무대에 섰다. 하지만 서양 클래식만으로는 살림을 꾸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대중가요 쪽으로 눈을 돌렸다. 하루 전인 8월 1일, 오사카 닛토레코드에서 언니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 한 곡을 녹음했다.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잔물결’ 선율에 윤심덕이 직접 가사를 붙인 곡, ‘사의 찬미’였다. 녹음 자리에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극작가 김우진도 함께였다고 전해진다. 와세다대 영문과를 나온 그는 조선 신극운동을 이끈 선구자였고, 이미 목포에 처자식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이 8월 2일 이날 정확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사흘 뒤 이들을 태운 관부연락선이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는 사실만은 뒷날의 기록으로 남았다. 한편 경성에서는 지난 6월 순종의 인산일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으로 붙잡혀 간 학생들의 공판이 여름 내내 이어졌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면에는 검거와 재판 소식이 계속 오르내렸다. 조선총독부는 올해부터 쌀 수탈을 더 늘리려는 제2차 산미증식계획에 나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안에 토지개량부를 새로 두었다. 같은 무렵 도쿄에 머물던 조선인 유학생들은 레닌주의동맹에 가입해 이른바 ‘ML파’라는 새 사회주의 조직을 꾸려가고 있었다.

경성과 한반도

윤심덕의 고향 평양과 김우진이 자란 목포는 이날 이후 전국 신문 지면에서 나란히 오르내릴 두 지역이었다. 하지만 8월 2일 시점에서는 아직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대신 전국 각지의 관심은 6·10만세운동의 뒷수습에 쏠려 있었다. 그해 4월 순종이 승하하고 6월 인산일에 만세시위가 일어난 뒤, 천여 명이 붙잡혀 갔고 제2차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무너졌다. 여름 내내 경성지방법원에는 관련자 공판이 줄을 이었고, 지방 각지에서도 검속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총독부가 새로 밀어붙이는 산미증식계획은 전국 농촌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토지개량이라는 이름 아래 수리조합 부담금이 늘고, 늘어난 쌀은 상당수가 일본으로 실려 나갈 예정이었다. 궁핍한 농가와 빈민, 걸인이 전체 인구의 11%에 이른다는 통계가 나올 만큼, 그해 여름 조선 농촌의 살림은 팍팍했다.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였던 6·10만세운동은 훗날 신간회 결성과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질 씨앗이 되지만, 이 여름의 조선인들에게는 아직 그저 견뎌내야 할 탄압의 시간이었다.

그날의 세계

중국에서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북벌을 이끌며 후베이성 우한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달 그는 군벌 쑨촨팡에게 투항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전선은 계속 남중국 일대로 번져 갔다. 지난달 리프전쟁의 지도자 압델크림이 프랑스에 항복하며 모로코의 큰 싸움은 일단락됐지만, 스페인령 곳곳에서는 소규모 저항이 이어졌다. 스페인 본토에서는 독재자 프리모 데 리베라를 노린 암살 미수 사건이 이달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8월 3일, 대서양 건너 멕시코에서는 정부의 종교 탄압에 맞선 농민들의 무장봉기, 이른바 크리스테로 전쟁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경성 24시

이날 경성의 아침은 평범했다. 종로 거리에는 신문팔이 소년들이 조간을 돌렸고, 남대문통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열었다. 정오 무렵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일대 카페와 서점에는 여름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드나들었다. 라디오 방송이 아직 없던 시절이라, 유행하는 노래는 축음기와 레코드 가게를 통해 퍼져 나갔다. 오사카에서 막 녹음을 마친 ‘사의 찬미’ 음반이 아직 조선 땅에 닿기 전이었지만, 몇 주 뒤면 이 노래가 골목마다 흘러나오게 될 터였다. 저녁 무렵 경성역 광장에는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사람들이 짐을 꾸려 오갔다. 그 가운데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널 두 예술가의 앞날을 아는 사람은, 이날 저녁까지도 아무도 없었다.

100년의 거울

1926년,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였던 윤심덕은 순수 예술만으로는 생계를 이을 수 없어 대중가요로 눈을 돌려야 했다. 여성이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 손가락질받던 시절, 그의 선택은 파격이자 생존이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조선의 후예들이 만든 대중음악은 지구 반대편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산업이 됐다. 아래 표는 그 100년의 거리를 보여준다.

항목 1926년 2026년
여성 예술가의 생계 클래식만으로는 생활 곤란, 대중가요 겸업 다양한 장르·플랫폼에서 독자적 활동 가능
음악의 유통 레코드판·축음기, 발매까지 수 주 소요 스트리밍, 발매 즉시 전 세계 동시 공개
대중음악의 위상 ‘딴따라’로 낮춰 불리던 변두리 문화 국가 대표 수출 산업, K팝 세계 흥행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조선말 가사를 붙였던 그 노래는, 100년 뒤 세계가 한국 대중음악을 따라 부르게 될 줄은 짐작조차 못 했을 것이다.

내일, 1926년 8월 3일에는 이 여름의 이야기가 또 한 걸음 나아간다. 시모노세키를 떠난 관부연락선 위에서, 두 사람은 그날 밤을 맞이하게 된다. 100년 전 오늘의 다음 장은, 내일 아침 10시 10분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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