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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 100년 전 오늘

[100년 전 오늘] 1926년 7월 29일 – 박열 부부 옥중 ‘괴사진’, 도쿄를 넘어 경성까지 뒤흔들다

[100년 전 오늘] 1926년 7월 29일 - 박열 부부 옥중 '괴사진', 도쿄를 넘어 경성까지 뒤흔들다

기사입력 기사번호 53838

10시 10분, 경성의 아침

1926년 7월 29일 목요일, 경성에는 눅눅한 한여름 더위가 내려앉았다. 이날 기온과 날씨를 구체적으로 전하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날 저물녘 도쿄발 소식 하나가 경성 신문사 편집국을 술렁이게 했다. 대역죄로 무기징역을 사는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가 옥중에서 함께 찍힌 사진이 ‘괴문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돌기 시작했다는 전보였다. 총독부의 검열 아래서도 이 소문은 골목마다 번져 나갔다.

그날의 경성

박열은 1923년, 일왕 부자를 겨냥한 폭탄 거사를 꾸미다 붙잡혀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인물이다.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그와 혼인하고, 함께 사상을 지켰다.

문제의 사진은 1925년 5월, 예심 조사실에서 찍힌 것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몸을 밀착하고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이었다. 이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 이는 예심판사 다테마쓰 가이세이였다고 훗날 밝혀진다. 사진은 오랫동안 조용히 묻혀 있다가, 1926년 7월 29일 ‘괴문서’라는 이름의 인쇄물에 실려 갑자기 세상에 튀어나왔다.

야당인 정우회와 정우본당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대역죄인을 특별 우대했다”며 이 사진을 집권 와카쓰키 내각을 무너뜨릴 무기로 삼았다. 일본 정부는 이날부터 사진과 관련 문서의 신문 게재를 금지했다. 이 조치는 조선의 신문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정확한 국내 보도 일자와 지면은 확인되지 않으나, 검열의 그물 사이로 소문은 이미 퍼져 있었다.

파장은 도쿄 의회로 번져, 사흘간 회의가 멈춰 섰다. 사진 촬영을 허락한 다테마쓰 판사는 이후 사직서를 냈고, 8월 25일자 동아일보는 사건의 전말을 뒤늦게 자세히 전하게 된다.

경성과 한반도

이 소식은 석 달 전 순종 황제의 승하와 6월 10일 인산일 만세운동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조선 사회에 또 하나의 파문을 던졌다. 6·10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권오설 등 열두 명은 이미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기소된 상태였다. 박열의 이름은 조선 청년들 사이에서 이미 낯설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굽히지 않은 그의 사연은 대역죄인이라는 낙인 너머로 은근히 전해지고 있었다.

한편 같은 달 8일에는 서울청년회 계열 사회주의자들과 조선물산장려회 계열 민족주의자들이 손잡고 조선민흥회 발기를 시도했으나, 총독부는 발기총회조차 금지했다. 타협이냐 비타협이냐를 둘러싼 셈법이 복잡하게 얽혀가던 시절이었다.

그날의 세계

중국에서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7월 9일 광저우에서 북벌 서사식을 치르고, 후난과 우한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소련 고문 보로딘의 지원과 국공합작을 등에 업은 이 북벌은, 상하이 임시정부와도 이어진 조선 독립운동 진영에 적잖은 관심사였다.

유럽에서는 지난해 로카르노 조약의 여진 속에서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절차가 무르익고 있었다. 실제 가입은 두 달 뒤인 9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도쿄에서는 박열 부부 사진 사건으로 정국이 흔들리는 사이, 와카쓰키 내각은 이 여름 내내 야당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경성 24시

아침나절, 종로 신문 가판대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목청을 높이는 소리에 지나던 인력거꾼도 잠시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활판 인쇄소 일꾼들은 밤새 조판을 짜느라 손이 분주했다. 검열로 몇 줄이 먹으로 지워진 지면을 두고도 사람들은 저희끼리 소문을 주고받았다.

한낮에는 관공서와 상점가 모두 여느 여름날처럼 돌아갔다. 장사치들은 더위를 피해 처마 밑에 좌판을 벌였고, 학생들은 방학을 맞아 거리를 오갔다. 해거름이 되자 카페와 다방에는 이 소식을 화제 삼는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대역죄인의 옥중 사진 한 장이 바다 건너 내각을 흔든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에게는 신기하고도 서늘한 이야깃거리였다.

100년의 거울

사진 한 장, 문서 한 장이 검열의 손에 막히거나 풀리는 일은 1926년 조선과 일본의 일상이었다. 오늘날과 견주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항목 1926년 2025년
보도 통제 총독부·정부의 사전 검열, 게재 금지 처분 언론 자유 보장, 사후적 명예훼손 소송
정보 확산 속도 인쇄물·구전, 확산에 며칠~몇 주 온라인 실시간 확산, 몇 분
권력 감시 야당의 정치적 이용, 제한적 공론화 다매체 교차 검증, 국정감사·소셜미디어 감시

사진 한 장으로 내각이 흔들렸던 그 여름의 소동은, 정보가 권력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백 년 전에도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내일을 기다리며

내일, 1926년 7월 30일. 도쿄와 경성을 오가는 소문은 잦아들지 않을 참이다. 검열의 먹줄 너머로도 이야기는 계속 흐른다. 내일 아침 10시 10분,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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