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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8일 일요일 전체기사 로그인 회원가입 한국어 ENG 中文 日本語 Tiếng Việt

칼럼 박찬두

AI가 흔드는 장경각, ‘매끄러운 오역’의 덫에 걸리다

대장경 1억 자를 읽는 기계, 그러나 色(색)과 空(공)을 모르면 반야는 사라져
쉬워진 것은 번역 버튼이지, 진위 판단이 아냐
AI 시대일수록 한문 교육과 원문 해석 능력이 인간의 마지막 방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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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1억 자 분량의 데이터를 단 몇 초 만에 번역하고 분석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제 불교 경전의 원문을 입력하면 AI는 막힘없이 현대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낸다. 문장은 자연스럽고, 표현은 세련되며, 속도는 인간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AI는 방대한 고전을 융합해 유창한 현대어로 풀어내지만, 불교 교리의 맥락이 없는 번역은 신뢰할 수 없는 ‘그럴싸한 왜곡’을 낳을 수 있다. 문제는 AI가 틀린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너무 매끄럽게 틀린다는 데 있다.

이번 칼럼은 AI 번역이 불교 한문 고전에서 어떤 방식으로 오류를 일으킬 수 있는지, 그리고 왜 AI 시대일수록 인간의 철저한 한문 교육과 텍스트 비판 능력이 더 중요해지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금강경(金剛經)』, 『반야심경(般若心經)』, 『유마경(維摩經)』, 『법화경(法華經)』, 『잡아함경(雜阿含經)』 등 대표 경전 속 문장을 중심으로 기존 해석과 AI식 오역 위험, 그리고 한문학적·교리적 맥락을 반영한 올바른 해석을 대조했다.

 [코리안투데이] AI는 대장경을 빠르게 읽지만, 한 글자 안에 담긴 교리의 층위까지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이미지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금강경』의 핵심 구절인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이 문장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본에 나오며,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기준으로는 T235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 확인되는 대표 구절이다. 기존 및 올바른 해석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즉 집착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이다.

그러나 AI가 이 문장을 불교 교리 맥락 없이 단어 단위로 처리하면 “마땅히 살 곳이 없으니, 그 마음을 일으켜라”와 같은 오역을 한 예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住다. 일반 한문에서 住는 “머물다”, “살다”, “거주하다”로 옮겼다. 그러나 『금강경』 문맥에서 住는 단순한 거주 행위가 아니다. 住는 대상에 마음이 달라붙는 것, 곧 집착·고착·분별에 머무는 상태를 뜻한다. 無所住는 “살 곳이 없음”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도 마음을 고정하지 않음”이다.

이 구절은 대승불교(大乘佛敎) 수행론의 심장부에 가깝다. 색(色, 물질적 현상), 성(聲, 소리), 향(香, 냄새), 미(味, 맛), 촉(觸, 감촉), 법(法, 마음의 대상)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그런데 AI가 住를 물리적인 거주로만 해석하면,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부처의 말씀이 갑자기 “살 집이 없으니 결심하라”는 생활 상담처럼 변한다. 경전의 무집착 사상이 주거 문제로 바뀌는 순간이다.

문제는 이런 번역이 완전히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땅히 살 곳이 없으니 그 마음을 일으켜라”라는 문장은 현대 한국어로는 꽤 자연스럽다. 그래서 초학자나 일반 독자는 그 문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매끄러운 오역’의 위험이 드러난다. 과거의 기계 번역은 어색해서 오히려 의심할 수 있었다. 지금의 AI 번역은 자연스러워서 더 위험하다.

두 번째 사례는 『반야심경』의 “色不異空 空不異色(색불이공 공불이색)”이다. 이 문장은 현장(玄奘·현장) 한역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에 나오며, 대정신수대장경 기준으로는 T251 『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확인된다. 기존 및 올바른 해석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이다. 여기서 色은 단순한 색깔이 아니라 물질적 현상 전체, 곧 오온(五蘊,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 가운데 색온(色蘊)을 가리킨다. 空은 빈 공간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이를 공성(空性·공성, 모든 존재가 독립적이고 영원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성질)이라고 한다.

AI의 오역 위험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色을 “색깔”로, 空을 “빈 공간”으로 처리하면 “색깔은 비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공간은 색깔과 다르지 않다”는 문장으로 번역했다. 문장만 보면 이상하게 철학적인 표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반야 사상의 핵심을 완전히 놓친 번역이다. 『반야심경』은 색채와 공간의 관계를 말하는 경전이 아니다. 존재가 고정된 실체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통찰을 압축해 말하는 경전이다.

AI는 빛 색(色) 자를 단순 시각적 색상으로, 빌 공(空) 자를 물리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로 치환한다. 그러나 불교 철학에서 色은 물질적 존재 전체를 뜻하고, 空은 허무나 공백이 아니라 자성(自性, 스스로 독립해 존재하는 고정된 본질)이 없음을 뜻한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파란색과 빈 방이 닮았다는 뜻이 아니다. 현상과 공성이 따로 떨어진 두 실체가 아니라는 대승불교의 압축된 선언이다.

 [코리안투데이] 色은 색깔이 아니고, 空은 빈 방이 아니다.(이미지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세 번째 사례는 『유마경』의 인명 오인 문제다.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구마라집 한역본은 대정신수대장경 T475에서 확인된다. 관련 장면은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이 유마힐(維摩詰) 거사의 병을 문안하는 대목이다. 원문 예시는 “文殊師利 問疾 維摩詰(문수사리 문질 유마힐)”이다. 올바른 해석은 “문수사리 보살이 유마힐에게 병문안을 가 건강을 묻다”이다.

그러나 AI가 고유명사를 인식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 “문수사리가 ‘유마힐’이라는 유일한 말에 대해 질책하며 물었다”로 번역했다. 이 오역은 고전 번역에서 AI가 자주 범할 수 있는 고질적 오류다. 한역 불전에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 고대 인도 문헌어)와 중앙아시아계 이름을 음역(音譯, 뜻이 아니라 소리를 옮기는 번역 방식)한 고유명사가 많다. 文殊師利는 문수사리, 維摩詰은 유마힐, 舍利弗은 사리불, 須菩提는 수보리, 阿難은 아난, 目犍連은 목건련이다. 이런 이름들은 뜻을 풀어 번역할 대상이 아니라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

AI가 이를 낱글자로 분해하면 문제가 생긴다. 文(문)은 글, 殊(수)는 다르다, 師(사)는 스승, 利(리)는 이롭다, 維(유) 또는 唯(유)는 오직, 摩(마)는 문지르다, 詰(힐)은 힐문하다로 처리될 수 있다. 그 결과 문수보살과 유마 거사가 마주 앉아 병과 깨달음을 논하는 장면은 사라지고, “오직”, “힐문”, “스승”, “글” 같은 단어 조각만 남는다. 경전의 인물 관계가 무너지고, 대화 구조가 붕괴된다. 사람 이름을 사람 이름으로 읽지 못하는 순간, 번역은 이미 끝난 셈이다.

네 번째로 주목할 사례는 『법화경』의 方便(방편)이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구마라집 한역본은 대정신수대장경 T262에서 확인된다. 특히 「방편품(方便品) 第二(제이)」는 대승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원문 예시로 “諸佛以方便力 於一佛乘 分別說三(제불이방편력 어일불승 분별설삼)”을 들 수 있다. 올바른 해석은 “모든 부처는 방편의 힘으로 하나의 불승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셋으로 나누어 설한다”에 가깝다.

여기서 方便은 단순히 “편리한 방법”이 아니다. 불교에서 방편은 중생(衆生,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모든 존재)의 근기(根機,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능력과 수준)에 맞춰 진리로 이끄는 부처의 교화 방식이다. 이를 선교방편(善巧方便, 능숙하고 지혜로운 교화 수단)이라고도 한다. 또한 佛乘(불승)은 “부처의 차량”이 아니다. 乘(승)은 문자적으로 수레라는 뜻이 있지만, 불교에서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또는 가르침의 체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佛乘은 부처가 되는 길, 곧 불승이다.

AI가 이를 일반어로만 처리하면 “여러 부처는 편리한 방법의 힘으로 하나의 불교 차량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했다”로 번역했다. 이렇게 되면 『법화경』의 장엄한 교화론은 이상한 교통 안내문처럼 변한다. 부처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은 “편리한 방법”으로 축소되고, 불승은 “부처의 차량”으로 납작해진다. 글자는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뜻은 틀린 번역이다.

『법화경』에서 방편은 결코 임시방편이나 꼼수의 의미가 아니다. 중생의 이해 수준에 맞춰 여러 방식으로 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불승으로 이끈다는 대승불교의 핵심 전략이다. 삼승(三乘·삼승,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이라는 세 가지 수행 길)을 말하지만 결국 일불승(一佛乘, 모두가 부처의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하나의 길)으로 귀결된다는 사상이 여기에 담겨 있다. AI가 이 맥락을 놓치면, 법화의 사상은 ‘편리한 설명 방식’ 정도로 줄어든다.

 [코리안투데이] 방편은 꼼수가 아니라, 중생을 진리로 이끄는 교화의 지혜다.(이미지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다섯 번째 사례는 불교의 가장 기본 명제 가운데 하나인 “諸行無常 是生滅法(제행무상 시생멸법)”이다. 이 구절은 『잡아함경』 등 초기불교 계열 한역 경전에서 확인되는 핵심 사상과 연결된다. 대정신수대장경 기준으로 『잡아함경』은 T99에 수록되어 있다. 올바른 해석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며, 이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법이다”이다.

여기서 行(행)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삼스카라), 팔리어(Pāli·팔리, 초기불교 경전 언어) saṅkhāra(상카라)에 대응하는 말로, 조건에 의해 형성된 모든 것, 곧 유위법(有爲法,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변하는 존재)을 가리킨다. 無常(무상)은 “정상이 아님”이 아니다. 항상하지 않음,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 않음, 변화함을 뜻한다. 그런데 AI가 현대 한국어의 습관에 끌려가서 “모든 행위는 정상적이지 않으며, 이것은 생멸의 법이다”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문법적으로 그럴듯하다. 諸(제)를 모든, 行을 행위, 無常을 정상적이지 않음으로 해석하면 얼핏 문장이 된다. 그러나 불교 교리에서는 치명적이다. 부처는 인간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조건 지어진 모든 존재가 생겨나고 사라지며, 고정된 실체로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인 것이다. “諸行無常”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존재론적 통찰이다. 이 차이를 모르면 불교의 기본 명제조차 전혀 다른 말이 된다.

이 다섯 사례는 서로 다른 경전에서 나온 문장이지만, 오류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AI는 가장 많이 쓰이는 통계적 단어 매칭에 의존한다. 住는 거주하다, 色은 색깔, 空은 빈 공간, 方便은 편리한 방법, 乘은 차량, 行은 행위, 無常은 비정상으로 끌려가기 쉽다. 반면 인간 학자의 안목은 경전이 쓰인 시대상과 역사적 배경, 교리의 구조, 한문 문법, 음역어의 관습, 주석 전통을 함께 본다. 이것이 한문 교육의 본질이다.

AI 번역의 한계는 단순히 “조금 틀린다”는 수준이 아니다. 문장은 매끄러운데 속뜻이 통째로 날아갈 수 있다. 이것을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AI가 사실이 아니거나 근거가 부족한 내용을 그럴듯하게 생성하는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불교 경전 번역에서 할루시네이션은 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경전 문장은 짧고 압축적이며, 한 글자 안에 교리와 수행 전통이 겹겹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전 첫 번째 뜻으로는 열리지 않는 문장들이 많다.

위경(僞經, 후대에 만들어졌거나 진위가 의심되는 경전)을 가려내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AI는 데이터가 주어지면 가짜 경전도 진짜처럼 번역할 수 있다. 문체가 그럴듯하고 어휘가 불교적으로 보이면, 일반 독자는 그것을 진짜 전통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인간 학자는 원전의 어휘 패턴, 시대별 문체, 번역가의 용어 습관, 사상사적 맥락을 분석해 후대의 가공을 판별한다. 이 능력은 단순 번역 능력이 아니라 문헌 비판 능력이다.

오늘날 생성형 AI는 문맥을 모른 채 단어를 조합하면서도, 겉보기에는 완벽한 현대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재앙이다. 예전의 기계 번역은 어색해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의 AI 번역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심을 잠재운다. 초학자나 일반 대중은 문장이 유창하면 의미도 정확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불교 한문에서는 유창함이 정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창함이 오류를 감추는 포장지가 될 수 있다.

AI가 수천만 자의 대장경을 1초 만에 현대어로 뱉어내더라도, 그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인지, 후대의 곁가지인지, 교리를 파괴하는 둔갑인지 판별하는 최종 수문장은 사람이어야 한다. 한문 문법을 익히고, 고전 문헌을 비판적으로 해독할 수 있는 교육의 뼈대가 무너지면 우리는 AI가 왜곡해 놓은 지식 권력에 맹목적으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AI 시대야말로 텍스트의 원형을 탐구하는 인문학과 한문 고전 교육이 가장 강력한 인간의 무기로 부각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AI 번역 자체를 무용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AI는 방대한 원문을 빠르게 훑고, 용례를 모으고, 초벌 번역을 만들고, 반복되는 어휘를 정리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연구자의 시간을 줄여주고, 대중이 고전에 접근하는 문턱을 낮출 수도 있다. 문제는 AI가 낸 문장이 최종 해석처럼 소비될 때 발생한다. 특히 불교 한문처럼 한 글자 안에 교리와 수행 전통이 겹겹이 쌓인 텍스트에서는, 유창한 문장보다 중요한 것이 정확한 맥락이다.

 [코리안투데이] AI 시대의 번역자는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아니라, 원문과 번역 사이의 간극을 판별하는 사람이다.(이미지제공: AI 생성 이미지) ⓒ 박찬두 기자

결국 쉬워진 것은 AI 사용이지, 진위의 판단이 아니다. 데이터의 바다 속에서 진짜 지혜를 가려내기 위해 인간은 다시 붓을 들고 한자 원문을 대조하는 고독한 훈련으로 돌아가야 한다. 色이 색깔인지, 空이 빈 공간인지, 住가 거주인지 집착인지, 方便이 편리한 방법인지 교화의 지혜인지, 無常이 비정상인지 존재의 변화성인지 가려내는 눈이 필요하다.

AI는 대장경 1억 자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글자의 침묵 앞에 멈춰 서서, 그 글자가 어느 시대의 사유와 수행 속에서 태어났는지를 묻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한문 교육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AI가 만든 매끄러운 문장 속에서 지식의 왜곡을 가려내는 첫 번째 방파제다. 번역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해석의 책임은 더 무거워진다. AI 시대의 장경각을 지키는 힘은 기계의 속도가 아니라, 원문을 가려 읽는 인간의 눈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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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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