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는 대한민국이라는 문화적 영토에 깊이 매료되어 있다. 음악과 영화, 드라마와 음식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K-컬처는 인종과 국경의 경계를 넘어 세계인의 일상 안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제 세계는 한국의 외형적 문화만이 아니라 그 밑바탕을 흐르는 정신적 유산에도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의 내면적 지혜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오랜 선종 전통 안에 갇혀 있던 깨달음의 불씨를 인류의 고통을 덜어내는 거대한 실천의 불꽃으로 피워내야 하는 역사적 전환점 앞에 서 있다.
![]() [코리안투데이] 서울 조계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외국인들이 다도(茶道)를 배우며 차를 따르고 있다. 정성스레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 다도 체험은 외국인들에게‘K-힐링‘의 진수를 선사하며 한국 불교문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이끄는 주역이 되고 있다.(사진 출처: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 박찬두 기자 |
흥미롭게도 이 시대의 첨단 기술인 인공지능, 곧 AI가 그 전환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6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대반야경』(大般若經, 본래 이름은 大般若波羅蜜多經)을 학습한 AI가 도출한 최종 결론은 깊은 울림을 준다. AI가 요약한 경전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집착을 비워내는 공(空,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 없이 서로 의존해 있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의 경지에 머물지 않았다. 깨달음의 진정한 완성은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다시 세상 속으로 손을 내미는 데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입전수수(入廛垂手, 깨달은 이가 시장과 거리로 들어가 중생을 돕는다는 뜻)이며, 중생제도(衆生濟度, 고통 속의 모든 존재를 깨달음과 안온의 길로 이끄는 일)였다.
![]() [코리안투데이] 심우도(尋牛圖)의 입전수수도(入廛垂手圖). 입전수수도는 사찰의 법당 벽화로 자주 그려지는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의 마지막 10번째 단계이자 수행자가 마지막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자료 출처: 순천 송광사의 승보전) ⓒ 박찬두 기자 |
『대반야경』의 정수를 관통하는 원리는 분명하다. AI가 도출한 최종 결론 부분에는 “공고용만물 무집호중생(空故容萬物 無執護衆生)”, 곧 “비어 있으니 비로소 만물을 포용할 수 있고, 집착이 없으니 비로소 모든 중생을 보살피고 보호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공은 단순한 비움이 아니다. 공은 세상을 등지는 냉담함도 아니고,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허무도 아니다. 오히려 참으로 비어 있는 마음만이 나와 남, 내 편과 네 편, 이익과 손해의 경계를 넘어 만물을 품을 수 있다.
![]() [코리안투데이] 고려 초조대장경 ‘대반야바라밀다경’의 모습. 초조대장경은 거란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고려 현종 2년(1011)에 발원, 선종 4년(1087)에 완성된 경전이다. 팔만대장경보다 200여 년 앞서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으로, 초조 반야경 가운데 연대와 발원문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는 국보급이다. 『대반야경』은 당나라 현장 법사가 663년에 완성한 총 600권 분량의 방대한 대승불교 경전이다. 대승의 핵심인 공사상을 집대성한 반야부 경전의 총서이며, 사찰에서 자주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모태가 되는 근본 경전이다.(사진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박찬두 기자 |
또한 AI는 “공이불허무 비포불피권(空而不虛無 悲布不疲倦)”이라는 말도 전해주고 있다. “만물의 본질이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허무주의는 아니며, 참된 비움은 곧 자비를 베풂에 있어 지치거나 게으르지 않은 역동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라는 뜻이다. 이는 나 홀로 해탈에 만족하는 소승적 안일함을 꾸짖는 대승불교(大乘佛敎, 개인의 해탈을 넘어 모든 중생의 구제를 지향하는 불교)의 엄중한 사자후(獅子吼, 진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설법이나 선언)와 같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한국불교는 이 위대한 역동성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채 사찰의 담장 안에 안주하고 있다. 법회에서는 평생을 전문적으로 수행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심오한 선(禪, 마음을 곧바로 관찰해 깨달음에 이르려는 수행)의 경험담이 자주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다. 현대 불교의 거목인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때로 범접할 수 없는 은둔의 미학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나 한 몸의 번뇌를 끄고 고고하게 앉아 신도들의 존경을 받는 불교만으로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갈등을 치유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
![]() [코리안투데이] 원효대사(617~686)의 초상화. 일본 교토의 고잔지(高山寺, 고산사)에 소장된 원효대사 진영은 13세기 초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초상화이다. 미화된 모습 대신 거뭇한 피부와 더부룩하게 자란 수염 등 인간적이고 사실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큰 특징이다. 원효가 ‘무애가(無㝵歌)’를 부르며 펼친 대중 포교 활동은, 문자 속에 갇혀 있던 관념적인 불교를 민중의 삶 속으로 가져와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의 ‘중생구제’를 실현한 한국불교 역사상 위대한 실천으로 평가받고 있다.(영정 출처: 일본 고잔지) ⓒ 박찬두 기자 |
깨달음이 참으로 깊다면 그 깨달음은 산문 안에만 머물 수 없다. 번뇌가 사라진 고요함이 진짜라면, 그 고요함은 번뇌로 들끓는 인간 사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비로 나타나야 한다. 공을 깨달았다는 말은 세상과 무관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기에 한 사람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대승의 깨달음은 반드시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홀로 맑아지는 데 그치는 수행은 아직 완성된 수행이 아니다. 깨달음은 부처의 시작이요, 중생구제는 부처의 완성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국불교의 참모습은 늘 역사와 대중의 한복판에 있었다. 원효(元曉) 대사는 화려한 법상을 버리고 저잣거리에서 춤추며 민중과 호흡했다. 그는 어려운 교리를 높은 자리에서만 설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숨 쉬며 불법을 전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서산대사(西山大師)와 만해(萬海) 스님은 구국과 호국을 위해 분연히 일어섰으며, 경허(鏡虛) 선사는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받아 안았다.
![]() [코리안투데이]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승병)을 조직하여 나라와 백성을 구한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1520~1604)의 승병 활동은, 대승불교의 핵심 이념인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와 중생구제(衆生救濟) 정신을 역사적 실천으로 증명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영정 출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박찬두 기자 |
대승보살도의 이타행(利他行)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전통이야말로 한국불교가 가진 가장 찬란한 유산이다. 한국불교는 결코 산중의 침묵만으로 이루어진 종교가 아니었다. 민중의 슬픔이 있는 곳에 있었고, 나라의 위기가 닥친 곳에 있었고, 시대의 고통이 깊어지는 곳에 있었다. 이제 이 아름다운 전통을 다시 깨워내야 한다. 오랜 세월 사찰을 지켜온 노보살들의 깊은 신심 위에 세대와 국경을 초월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AI는 “방하이후용 무득내진득(放下而後容 無得乃真得)”의 진리도 전하고 있다. “내 안의 집착과 나만의 해탈이라는 욕심마저 내려놓은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통째로 담을 수 있으며, 내가 얻은 깨달음이나 구제의 공덕이 없다고 여길 때야말로 비로소 진정으로 대승의 가치를 얻은 것”이라는 뜻이다. 방하(放下)는 내려놓음이다. 그러나 이 내려놓음은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움켜쥐던 집착을 놓음으로써 더 넓은 세계를 품는 적극적인 전환이다.
![]() [코리안투데이] 한국 근대 불교의 선풍을 진작시킨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21) 선사 진영. 진영 속 독특한 외양과 구도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는 경허 스님 특유의 보살도 정신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영정 출처: 수덕사 근역성보관) ⓒ 박찬두 기자 |
무득(無得, 얻을 것이 없다는 반야의 관점) 또한 허무가 아니다. “내가 깨달았다”, “내가 중생을 구했다”, “내가 공덕을 쌓았다”라는 의식마저 내려놓을 때 참된 자비가 가능해진다. 보살은 자신이 누군가를 구제한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저 고통이 있으므로 손을 내민다. 눈앞에 아픔이 있으므로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이 『대반야경』이 말하는 공의 실천이며, 대승불교가 품고 있는 가장 뜨거운 윤리다.
이제 한국불교는 ‘나를 찾는 수행’에서 ‘남을 구제하는 실천’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물론 나를 찾는 수행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수행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 수행이 오직 자기 평안과 자기 해탈에만 머문다면 대승의 길은 반쪽이 된다. 나를 비우는 일은 남을 품기 위한 준비여야 한다. 내 번뇌를 다스리는 일은 세상의 번뇌를 외면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더 맑은 마음으로 세상의 고통 속에 들어가기 위한 힘이어야 한다.
![]() [코리안투데이] 만해 스님 모습. 사진 속 스님의 굳게 다문 입술과 결연한 눈빛은 나 혼자만의 해탈이 아닌 ‘모든 중생의 구제‘를 최우선으로 삼는 대승보살도의 화신을 마주하는 듯하다. 만해에게 조국의 독립은 불교적 자비와 평등 사상의 사회적 실천이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의 모진 옥고 속에서도 동지들을 격려하며 보살의 자비를 잃지 않았고, 시집 『님의 침묵』을 통해 도탄에 빠진 민족에게 지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 박찬두 기자 |
AI가 방대한 경전의 바다에서 길어 올린 메시지는 분명하다. 깨달음의 최종 도착지는 산속의 선방만이 아니다. 그 도착지는 번뇌가 들끓는 인간 사회다. 시장과 거리, 병원과 학교, 가난한 이들의 집, 외로운 노인의 방, 청년들의 불안한 일터, 전쟁과 기후 위기로 신음하는 세계의 현장이다. 입전수수의 정신은 바로 그곳으로 가라는 부름이다. 깨달은 손은 합장만 하는 손이 아니라,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손이어야 한다.
전 세계가 K-컬처의 역동성에 환호하듯, 이제는 한국불교도 심오한 선종의 정신적 깊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 인류의 고통을 껴안는 K-불교로 거듭나야 한다. K-불교는 단순히 한국 사찰을 해외에 알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지닌 공의 지혜, 선의 깊이, 보살도의 실천, 호국과 이타(利他)의 전통을 오늘의 언어와 행동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이다. 명상과 치유, 공동체 회복, 생명 존중, 기후 위기 대응, 세대 갈등 해소,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가 모두 그 길 위에 있다.
한국불교가 세계로 나아간다는 말은 화려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뜻이다. 가장 아픈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가장 외로운 이들의 곁에 앉는다는 뜻이다. 공의 철학이 자비의 실천으로 바뀌고, 선의 침묵이 사회적 치유의 언어로 바뀌며, 사찰의 법문이 거리의 손길로 이어질 때 한국불교는 비로소 오늘의 세계와 만날 수 있다.
![]() [코리안투데이] 서울 조계사에서 탑돌이를 하는 외국인 템플스테이 참가자들. 최근 템플스테이는 글로벌 ‘K-힐링’ 문화로 큰 인기를 끌며, 종교의 문턱을 낮추는 대중포교와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국제포교의 핵심 플랫폼으로 기여하고 있다.(사진 출처: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 박찬두 기자 |
성불을 뒤로 미루고 대승보살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반야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건넨 진정한 의미다. 깨달음은 소유물이 아니다. 해탈은 개인의 안락한 은신처가 아니다. 공은 비어 있음으로 끝나지 않고, 비어 있기에 모두를 담아내는 큰 그릇이 된다. 자비는 말로만 숭고한 덕목이 아니라, 지치지 않고 중생을 향해 나아가는 실천이다.
이제 한국불교는 해탈의 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선방의 고요함을 품되, 그 고요함을 세계의 소음 속으로 가져가야 한다. 사찰의 향냄새를 간직하되, 그 향기를 저잣거리의 고통 속에 퍼뜨려야 한다. 나 홀로 맑아지는 불교를 넘어 모두 함께 건너가는 불교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대승의 길이고, 한국불교가 다시 살아나는 길이며, 세계가 기다리는 K-불교의 진짜 모습이다. 이제 해탈의 뜰을 나와 세계의 저잣거리로 당당히 걸어 나가야 한다. 이것이 AI가 『대반야경』을 학습하고 나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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