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깃발을 들었다.
668년 9월, 평양성이 무너지고 보장왕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20만에 가까운 고구려 백성이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당했고, 왕조는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멸망은 끝이 아니었다. 폐허가 된 옛 고구려 땅 곳곳에서, 흩어진 유민들은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은 왜 다시 깃발을 들었을까. 그리고 그 불꽃은 누구의 손에 의해, 어떻게 다시 꺼져갔을까.
◆ 시대의 풍경
평양성이 함락된 이듬해인 669년 2월,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이 4천여 호에 달하는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했다. 옛 고구려 땅에는 여전히 당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은 유민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이들은 구심점이 될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670년 4월, 수임성 출신의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흩어진 유민들을 규합해 거병했다. 그는 서해의 작은 섬 사야도에서 안승을 맞아들여 왕으로 추대하고, 그해 6월 한성(漢城, 오늘날 황해도 재령 일대로 추정)에 자리를 잡아 부흥 세력의 근거지로 삼았다. 신라 문무왕은 사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정식으로 ‘고구려왕’에 책봉했다. 마침 같은 해 3월, 신라군과 고구려 유민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선제공격하며 나당전쟁의 막이 올랐다. 신라로서는 옛 고구려 유민 세력을 당에 맞설 완충지대이자 동맹군으로 끌어안을 실리가 분명했다.
“수임성 사람 대형 검모잠이 남은 백성을 모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기까지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를 향해 가다가,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당)
670년 7월, 당은 서쪽 대비천에서 토번(티베트)에 대패해 안서사진을 잃었다. 동서 양면 전선에 몰린 당은 옛 고구려 유민 세력을 힘으로 완전히 제압할 여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 유럽/중동
674년, 비잔티움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우마이야 왕조의 첫 대규모 포위 공격을 받기 시작한다. 멸망 직전의 제국이 도성 하나로 버텨낸 시기, 고구려 유민들도 옛 왕성 대신 새 근거지에서 버텨내고 있었다.
🌏 일본
672년 임신의 난으로 왕위에 오른 덴무 천황 시기, 왜는 익산의 보덕국과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았다 — 멸망한 나라의 이름이 외교 문서 위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미지: 안승과 고구려 부흥 세력의 이동 경로 — 한성(670) → 금마저·보덕국(674) → 경주(683)]
⚔️ 그날의 현장
“서해의 작은 섬, 파도가 배 밑창을 때리는 소리만 들리는 사야도. 검모잠은 무릎을 꿇고 젊은 왕족 안승 앞에 고구려의 마지막 깃발을 내려놓았다. ‘전하, 백성들이 기다립니다.’ 그 순간까지는, 그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당의 대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이 한성에 닿았을 때, 두 사람의 눈빛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검모잠은 평양으로 되돌아가 옛 도성을 되찾자 했고, 안승은 신라 쪽으로 몸을 피하자 했다. 갈라선 길 끝에서, 부흥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고구려 부흥운동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두 단계를 거친 긴 여정이었다. 첫 단계는 670년 한성을 근거지로 세워진 ‘한성 고구려국’이다. 검모잠이 실질적인 군사력을 쥐고, 안승이 상징적 구심점이 되는 이원 체제였다. 그러나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에게 대군을 주어 남하시키자, 이 대응을 둘러싸고 내부가 갈라졌다. 옛 도성 평양을 다시 되찾자는 검모잠의 강경론과, 신라에 의탁해 전력을 보존하자는 안승의 현실론이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결국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남은 세력을 이끌어 신라로 넘어갔다. 사서는 그 정확한 경위를 자세히 남기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노선 차이가 부흥 세력을 두 쪽으로 갈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신라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오늘날 전북 익산)에 정착시키고 674년 안승을 ‘보덕국왕(報德國王)’으로 다시 책봉했다. 보덕국은 고구려와 같은 5부 체제와 관등 조직을 갖추고, 나당전쟁에 신라군과 함께 참전했으며, 일본에도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는 등 1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683년, 신라 신문왕은 안승을 경주로 불러들여 ‘김씨’ 성과 소판 관등을 내리고 신라 진골 귀족으로 편입시켰다. 이는 사실상 보덕국 왕실의 해체를 의미했다. 이듬해인 684년, 안승의 친족인 대문(大文)이 금마저에서 신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신문왕은 남은 유민들을 신라 남쪽 여러 주와 군으로 분산 이주시켰다. 668년 평양성 함락에서 시작된 16년간의 저항은 이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시대
670년~684년
핵심 인물
안승, 검모잠
핵심 사건
한성 고구려국 → 보덕국
영향
나당전쟁의 향방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신라는 나당전쟁이라는 실리적 필요 때문에 안승 세력을 활용했을 뿐, 전쟁이 끝나고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683~684년 사이 체계적으로 흡수·해체했다는 ‘토사구팽’적 해석이 오랫동안 주류였다.
대안적 견해
최근 연구는 보덕국이 단순히 이용당한 존재가 아니라, 독자적 관제와 대일 외교를 운영한 준독립 정치체였다는 점을 강조하며, 대문의 난 역시 일방적 흡수가 아니라 자율성을 지키려 한 유민 세력의 마지막 저항으로 본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나라를 잃은 뒤에도 이름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1300여 년 뒤 우리 역사에서 다시 반복된다. 1919년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국권을 잃은 땅 밖에서 국호와 정통성을 이어가려 한 시도였다. 한성 고구려국과 보덕국이 완전한 독립이 아닌 제한된 자치 속에서도 정체성을 붙들었듯, 임시정부 또한 열강 사이에서 실체보다 상징으로 먼저 존재해야 했다.
안승과 검모잠의 노선 대립이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 힘을 잃은 공동체가 살아남으려 할 때, 이상을 고수할 것인가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정답은 없었지만, 그 선택들이 쌓여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저항의 기억을 남겼다.
| 구분 | 고구려 부흥운동 | 현재 |
|---|---|---|
| 정치/안보 | 신라의 책봉을 받아 이름만 왕국인 제한적 자치체 | 상하이 임시정부, 승인 없는 망명 정부의 정통성 투쟁 |
| 군사/외교 | 신라군과 연합해 나당전쟁 참전, 일본에 독자 사신 파견 | 연합군·우방국과의 외교로 독립운동 국제 지지 확보 |
| 문화/정신 | 고구려의 이름과 관제를 16년간 지속 | 잃어버린 나라의 정체성을 지켜낸 저항의 기억 |
[이미지: 고구려 부흥운동에서 근현대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저항 정신의 흐름]
📚 더 깊이 알아보기
- 보덕국의 도읍이었던 금마저(전북 익산)는 오늘날 미륵사지 등 백제·통일신라기 유적이 밀집한 지역으로, 보덕국 관련 유구는 문헌 기록에 비해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뚜렷이 확인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는 보덕국이 왜에 보낸 사신을 ‘견고려사(遣高麗使)’로 표기해, 멸망한 지 수년이 지나도 ‘고구려’라는 이름이 외교 문서 위에서 살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 검모잠과 안승의 갈등을 다룬 국내 사학계 논문들은 두 사람의 노선 차이를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멸망한 국가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전략 차이로 해석한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한성 고구려국도, 보덕국도 끝내 옛 고구려를 되살리지 못했다. 그러나 16년에 걸친 그 저항은 나라를 잃은 이들이 결코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에 새겨 넣었다.
“왕국은 무너져도, 불씨는 다음 세대의 손으로 옮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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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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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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