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8월 23일 월요일 · 처서(處暑) · 경성판
🕙 오전 10시 10분 · 오전판
더위가 한풀 꺾인다는 처서, 경성의 아침 하늘은 어제보다 한결 높았다. 골목을 걷는 사람들 옷깃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스몄다. 하지만 종로 축음기 상점 앞을 지나던 걸음을 붙든 건 날씨가 아니라 노래 한 소절이었다. 스무날 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소프라노 윤심덕의 목소리, ‘사의 찬미’가 가게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의 경성
8월 4일 새벽,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이 현해탄 뱃길에서 함께 사라졌다.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정사(情死)를 둘러싼 소문은 여름 내내 경성을 떠돌았다.
공교롭게도 윤심덕은 사라지기 사흘 전인 8월 1일 오전, 오사카 일동레코드 녹음실에서 마지막 곡을 남겼다.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편곡하고 직접 가사를 붙인 노래, ‘사의 찬미’였다. 이 음반이 8월 하순 들어 시중에 풀리면서, 경성 거리 축음기상마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정확한 발매일은 신문마다 엇갈려 확인되지 않지만, 이 무렵 종로와 본정의 레코드 가게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소식은 여러 갈래로 전해진다.
노래를 사려는 이들 틈에는 호기심 어린 눈길도, 애도의 눈길도 섞여 있었다. 신여성과 자유연애를 둘러싼 세간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던 시절, 죽음마저 화제와 논란의 소재가 되고 있었다.

경성과 한반도
같은 시각 경성지방법원 주변에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지난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학생들이 벌인 만세 시위, 이른바 6·10만세운동의 여진이었다. 6월 25일 열한 명이 제령 위반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뒤, 여름 내내 취조가 이어지고 있었다. 공판은 11월로 예정돼 있었으니, 8월의 경성지방법원가는 아직 조서와 신문(訊問)의 계절이었다.
한편 함경·평안 지방에서는 이달 초 폭우로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 유역이 물에 잠겼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지난해 을축년 대홍수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은 터라, 강가 마을 사람들은 하늘을 살피는 눈이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날의 세계
대서양 건너 뉴욕에서는 이날 낮,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 루돌프 발렌티노가 서른한 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타전됐다. 위궤양 천공으로 급성 수술을 받은 지 여드레 만이었다. 그의 죽음은 곧 뉴욕 거리를 뒤덮을 조문 인파와 소동의 서막이었다.
바로 전날인 8월 22일에는 그리스에서 콘딜리스 장군이 이끄는 무혈 쿠데타로 판갈로스 독재 정권이 무너졌다는 외신도 함께 들어왔다. 세계 곳곳에서 권력과 명성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던 여름이었다.

경성 24시
이 무렵 동아일보사가 배재·중앙·휘문·경신 등 사립 중학 넷의 재학생과 졸업생을 모아 연 ‘사구락부 연맹전’ 야구 대회가 화제였다. 교복 입은 소년들이 방망이를 쥐고 뛰노는 운동장은, 축음기 가게의 애상 어린 노래와는 또 다른 여름의 얼굴이었다.
아침나절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 한낮 시장을 오가는 장사치들, 해거름이면 골목마다 저녁밥 짓는 냄새가 번졌다. 처서를 지나며 매미 소리는 조금씩 잦아들고, 사람들은 곧 다가올 가을걷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00년의 거울
| 1926년 | 항목 | 2026년 |
|---|---|---|
| 축음기와 유성기판, 한 곡에 온 거리가 술렁임 | 대중가요 확산 속도 | 스트리밍 한 곡이 몇 시간 만에 전 세계로 |
| 제령·출판법으로 학생 발언을 통제 | 표현의 자유 | 헌법으로 보장, 다만 새로운 형태의 논쟁 계속 |
| 홍수 소식이 인편과 신문으로 며칠 늦게 전해짐 | 재해 정보 전달 | 실시간 경보와 위성 관측 |
백 년 전 한 여성의 마지막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퍼지던 속도와, 오늘 한 곡이 전 세계로 퍼지는 속도 사이에는 백 년의 기술이 놓여 있다. 하지만 사랑과 상실 앞에서 사람들이 노래에 기대는 마음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내일, 1926년 8월 24일의 경성은 또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처서를 지난 거리에서, 내일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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