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9월 1일 수요일 · 오전판
10:10 –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26년 9월 1일 수요일, 경성.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 아침, 종로 거리엔 신문팔이 소년들의 목소리가 유난히 높았다. 이날 신문 지면 한복판을 차지한 것은 다름 아닌 ‘괴사진’ 사건 — 일본 법무성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둘러싼 사진 소동의 전모를 마침내 밝혔다는 소식이었다. 감옥 안에서 숨을 거둔 한 여인과, 아직 재판을 기다리는 한 조선 청년의 이야기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날의 경성
박열(朴烈)은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 황태자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붙잡혀, 지난 3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인물이다. 그런데 가네코 후미코는 지난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 독방에서 스물세 살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 감옥 측은 목맨 자살이라 발표했으나, 사인을 둘러싼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여기에 8월 중순, 두 사람이 감방 안에서 나란히 찍힌 것으로 보이는 사진 한 장이 정계에 흘러들며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사진 속 자세와 촬영 경위를 두고 ‘누가, 언제, 왜 찍었는가’ 하는 의혹이 꼬리를 물었고, 이 ‘괴사진’ 소동은 급기야 법무성 관리의 문책론으로까지 번졌다. 그리고 이날, 마침내 일본 법무성이 사진의 촬영 경위와 유출 경로를 포함한 사건의 전모를 공식 발표했다. 조선 청년의 목숨을 건 재판이, 총독부 관보가 아니라 이런 스캔들을 통해 조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현실이었다. 경성 시내 찻집과 학생 하숙집에서는 이 소식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일부는 “조선인 청년이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다”며 박열을 다시 불러냈고, 일부는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언론 통제가 삼엄한 식민지 조선에서, 이 사건은 검열의 틈새로 새어나온 몇 안 되는 저항의 서사이기도 했다.

경성과 한반도
괴사진 사건이 장안의 화제였던 이 무렵, 조선 남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신음하고 있었다. 8월 말 마리아나 제도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이 북상하며 한반도 남부를 강타, 낙동강과 영산강, 섬진강이 잇따라 범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여름철 집중호우 피해를 입은 남부 농촌에서는 논밭이 물에 잠기고 제방이 무너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이어졌다. 총독부는 군대와 청년단, 지역 유지들의 ‘구호 활동’을 앞세워 대응을 자랑했지만, 정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집을 잃었는지 구체적인 피해 규모는 신문에 소상히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총독부는 올해부터 ‘제2차 산미증식계획’에 착수해, 12년에 걸쳐 토지 개량과 화학비료 보급을 늘리겠다고 밝힌 터였다 — 조선 쌀을 늘려 일본으로 실어 나르겠다는 계획이 수해로 신음하는 농민들의 삶과 어떻게 맞물릴지, 지켜볼 일이었다. 경성에서 만난 남도 출신 상인들은 “고향 논이 다 잠겼다는 편지를 받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재해와 정책이 동시에 조선 농촌을 짓누르던 시절이었다.

그날의 세계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국민혁명군이 북벌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군대는 8월부터 우창, 한커우, 한양을 잇달아 점령하며 훗날 ‘우한’으로 불릴 세 도시를 손에 넣어가는 중이었고, 군벌 타도를 내건 이 전쟁은 동아시아 정세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지난달 급작스레 세상을 떠난 은막의 스타 루돌프 발렌티노의 운구 열차가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대륙 횡단길에 올라, 가는 역마다 애도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예멘의 이맘 정부를 승인하는 조약에 서명하며 중동에서 영향력을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캘빈 쿨리지가 이끄는 미국과 스탠리 볼드윈의 영국, 그 사이에서 식민지 조선의 하루는 여전히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경성 24시
이른 아침, 새 학기를 맞은 경성의 학교들은 등교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교복 차림의 남학생들과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학생들이 골목을 지나 교문으로 향했고, 몇몇은 지난여름 방학 동안 쓴 일기를 손에 쥔 채 재잘거렸다. 청년회관 앞에서는 야학에 다니는 노동 청년들이 저녁 수업을 준비하며 칠판을 닦고 있었다 —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교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었다. 시장 골목에서는 햇곡식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 좌판에 오른 밤과 대추를 흥정하는 목소리가 오갔다. 해거름이 되자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괴사진 사건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향했고, 어느 하숙집 마당에서는 등불 아래 신문을 돌려 읽는 청년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학교 앞 풍경 뒤에, 저마다의 긴장이 조용히 숨어 있던 하루였다.

100년의 거울
100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 항목 | 1926년 | 2026년 |
|---|---|---|
| 취학률(추정) | 보통학교 취학률 20%대, 여학생은 더 낮음 | 초·중·고 의무교육, 취학률 사실상 100% |
| 교육 언어 | 조선어·일본어 병용, 일본어 중심 정책 | 한국어 중심, 다국어 선택 교육 |
| 가을 먹거리 | 햇밤·대추 등 제철 잡곡·과실 중심 | 사계절 유통되는 다양한 먹거리 |
| 청년의 밤 | 야학·등사 격문 등 배움과 저항이 뒤섞인 시간 | 온라인 강의·SNS로 확장된 학습과 소통 |
숫자로 보면 아득한 격차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또래끼리 나누는 이야기의 온기만큼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내일, 1926년 9월 2일에는 또 어떤 소식이 종로 거리를 채울까. 괴사진 사건의 파장은 쉬이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접고, 내일도 변함없이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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