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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

[역사는 살아있다 – 백제 편] 제12화: 왕흥사 – 백제 불교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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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백제 편

제12화: 왕흥사 – 백제 불교의 중심

손바닥에 올릴 만한 황금 병 하나가 역사책의 연도를 스물세 해나 앞으로 끌어당겼다.

2007년 가을, 충남 부여 규암면의 절터에서 발굴단은 목탑 자리 한가운데의 돌 구멍 속에서 세 겹으로 포개진 그릇을 꺼냈다. 가장 바깥 청동 합의 표면에는 가는 글씨 29자가 새겨져 있었다. 《삼국사기》가 “600년에 창건했다”고 적은 왕흥사가 실제로는 577년에 이미 탑을 세우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기록보다 유물이 먼저 말한 순간이다.

왕흥사는 왜 그토록 오래 지어졌으며,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이 절은 어떻게 백제 불교의 중심이 되었을까. 그리고 이 작은 사리병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 시대의 풍경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한 뒤 왕위를 이은 이가 위덕왕(창, 昌)이다. 그는 아버지를 잃은 충격과 신라에 대한 원한, 흔들리는 왕권을 안은 채 재위 45년을 버텼다. 위덕왕은 군사로 판을 뒤집기 어려운 시기에 불교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대외 관계를 이어 가는 길을 택했다. 그 중심에 왕흥사가 있었다.

왕흥사는 사비(부여)의 왕궁과 부소산성에서 백마강(금강)을 건너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향을 피우러 가는 절이었으니, 물길 자체가 의례의 일부였다. 577년, 위덕왕은 사리를 봉안하며 탑을 세웠다. 같은 해 백제는 일본에 경론과 율사·선사·비구니·주금사·조불공·조사공을 보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절을 짓는 기술과 사람이 곧 외교였다. 이 흐름은 588년 아스카데라 건립을 위한 대규모 기술자 파견으로 이어진다.

“왕흥사가 완성되었다. 그 절은 물가에 임해 있었고 채색과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하였다.”

– 출처: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5 무왕 35년(634) 2월 (현대어 풀이)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577년 북주가 북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통일했다. 북주 무제는 574년 불교를 금지했고 이 조치는 북제 옛 땅까지 미쳤다. 백제가 사리를 모시며 탑을 세우던 바로 그때 화북에서는 절과 경전이 파괴되고 있었다. 불교는 581년 수나라 건국 뒤에야 되살아났다.

🗿 유럽/중동

비잔틴 제국은 유스티누스 2세(재위 565~578) 치하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었다(572~591). 유스티니아누스의 대성당 하기아 소피아(537)가 완공된 지 40년쯤 되던 때다. 사산조는 호스로 1세(재위 531~579)의 시대였다.

🌏 기타 지역

일본은 비다쓰 천황(572~585) 때로, 백제의 승려와 기술자를 받아들이며 최초의 본격 사찰 아스카데라(588년 착공)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앵글로색슨이 브리튼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577년 데오르햄 전투가 이 시기의 일이다. 이슬람은 아직 태동 전이었으며 무함마드는 일곱 살 안팎의 아이였다.

왕흥사 가람배치 복원도 (1탑 1금당) 백마강(금강) 배를 타고 건너 왕이 행차 맞은편: 부소산성·사비 왕궁 회랑 강당 금당 목탑 (중심 돌 사리공 = 577년 사리기 출토) 중문 북 ↑ 남북 일직선

[이미지: 왕흥사 가람배치 개념도 –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으로 놓이고 회랑이 둘러싼 백제식 1탑 1금당. 세부 비례는 단순화한 도식]

⚔️ 그날의 현장

“577년 음력 2월 15일,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날로 여겨지는 아침이었다. 강 위로 안개가 걷히자 왕의 배가 건너편 절터에 닿았다. 새로 다진 심초석 한가운데에는 작은 구덩이가 뚫려 있었고, 승려들의 독경이 물 위를 낮게 흘렀다.”

“사리는 두 알을 모실 준비였다. 그런데 봉안하는 순간 세 알이 되었다고 훗날 명문은 적는다. 왕은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우는 탑 앞에서 그 ‘신의 조화’를 받아들였다. 청동 합에 글자를 새기는 장인의 정 소리가 그 뒤를 따랐다.”

※ 위 장면은 사리기 명문과 발굴 사실에 근거해 재구성한 것으로, 세부 묘사는 상상입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핵심 유물은 왕흥사지 목탑 터에서 나온 사리기 일괄이다. 사리공 안 돌 사리감에서 청동 합, 은제 호, 금제 병이 겹겹이 나왔다. 가장 바깥 청동 합에는 6행 29자의 명문이 있다. “정유년(丁酉年)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본래 사리 2매를 묻으려 하였으나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정유년은 577년이고 창은 위덕왕이다. 흔들림 없는 절대연대를 가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리기로, 국보 제327호로 지정돼 있다.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으려 하였으나,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

– 출처: 부여 왕흥사지 출토 청동제 사리합 명문 (577년, 금석문 1차 사료, 현대어 풀이)

문헌과 유물은 어긋난다. 《삼국사기》는 법왕 2년(600)에 “왕흥사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도승했다”고 하고, 무왕 35년(634)에 절이 완성되었다고 적는다. 유물은 그보다 23년 앞선 577년에 탑에 사리를 모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왕흥사는 위덕왕 때 착수해 법왕을 거쳐 무왕 대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된 반세기짜리 국가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죽은 왕자를 위한 원찰로 시작한 절이 왕실 전체의 사찰로 커진 것이다.

건축에도 백제의 특징이 또렷하다. 발굴로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으로 놓이고 회랑이 둘러싼 1탑 1금당식 배치가 확인되었다. 이 배치는 사비 시기 백제 사찰의 전형으로 보이며, 탑 하나를 중심에 놓아 신앙의 초점을 분명히 한다. 목탑에서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이어지는 백제 탑 양식의 흐름도 여기서 출발한다. 또 왕흥사는 강가에 있어 뱃길로 왕이 접근하도록 설계되었고, 이는 《삼국사기》의 “임수(臨水)” 기록과 맞물린다. 정치적으로는 성왕 전사 이후 흔들린 왕권을 종교 의례로 봉합하려는 전략이었다.

시대

6세기 후반(577년 사리 봉안)~7세기 전반(634년 낙성)

핵심 인물

위덕왕(창), 법왕, 무왕

핵심 유물

청동합·은제호·금제병 세 겹 사리기(국보 제327호), 29자 명문

영향

백제 사찰의 표준, 일본 아스카데라로 이어진 기술 교류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577년은 창건(착수·사리 봉안)이고, 《삼국사기》의 600년 기사는 법왕 때의 도승과 사원 정비, 634년은 준공으로 보아 장기 조영 사업으로 이해한다. 명문의 ‘죽은 왕자’는 위덕왕의 아들로 본다.

대안적 견해

600년 기사를 별개의 재창건이나 사료 착오로 보는 시각이 있다. 또 발원의 정치적 배경을 왕자 추복에 한정하지 않고, 성왕 전사 이후 위덕왕이 추진한 왕권 재건 프로젝트로 넓혀 읽자는 해석도 있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왕흥사는 660년 6월, 백제가 무너지기 직전의 흉조 기록에 다시 등장한다. 《삼국사기》는 이때 왕흥사의 여러 승려가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적는다. 절이 사라지기 전에 강과 배와 절이 한 폭의 풍경이었다는 마지막 증언이다. 지금 그 절터에는 기단과 주춧돌만 남았지만, 땅속의 작은 병 하나가 1,400여 년 만에 절의 나이를 바로잡았다.

이 발견은 종교 건축과 문화재를 보는 우리의 눈을 바꿨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639년 사리봉안기가 나오며 백제 불교의 연대표는 더 촘촘해졌다. 이후 가치 있는 발굴 성과가 국보로 지정되고, 발굴·보존·전시가 하나의 국가 사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왕흥사지는 사적 제427호로 보호받고 있고,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8곳에는 들어 있지 않다. 정신문화는 화려한 유산 목록이 아니라 잊힌 자리를 계속 파 보는 일에서 이어진다.

구분 백제 시대 현재
정치/왕실 왕실이 직접 절을 세워 권위와 정통성을 확보 국가가 문화유산을 지정·보호해 공동체 정체성을 유지
외교/기술교류 사찰 기술자·승려 파견으로 일본과 교류(577년, 588년) 한일 문화재 공동 연구와 전시 교류
문화/정신 추모와 발원을 담은 사리 공양, 1탑 1금당의 정연한 질서 종교 건축의 보존과 복원, 기억과 애도의 공간으로 계승

세 겹 사리기와 왕흥사의 1,400년 사리기 단면 (바깥 → 안) ① 청동 합 (29자 명문) ② 은제 호 ③ 금제 병 사리 577 위덕왕, 목탑에 사리 봉안 600 《삼국사기》 법왕 2년 창건 기사 634 무왕 35년 낙성, 왕의 뱃길 행향 660 백제 멸망, 절문에 돛대 흉조 2007 목탑 터에서 사리기 발견 오늘 국보 제327호, 사적 제427호

[이미지: 청동합-은제호-금제병의 세 겹 구조와 왕흥사의 연대기. 크기와 비례는 도식화한 것]

📚 더 깊이 알아보기

  • 사리기가 나온 목탑 터는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2000년부터 이어 온 왕흥사지 발굴 조사에서 확인되었다. 2007년 8차 조사가 결정적이었다.
  •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는 1995년 석조 사리감이 나왔는데, 567년(창왕 13년)에 왕의 누이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명문이 있었다. 왕흥사 사리기와 함께 백제 왕실의 사리 공양을 보여 주는 쌍둥이 자료다. 이 절터에서 다음 편의 주인공 백제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다.
  • 일본 아스카데라의 창건 배경과 백제 기술자 파견은 《일본서기》와 발굴 성과를 함께 볼 때 왕흥사와의 연결이 또렷해진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백제 사찰 출토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왕흥사는 왕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시작해 나라의 신앙과 기술이 모이는 자리가 되었다. 사라진 절이 남긴 것은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글자 스물아홉 개와 세 겹의 작은 그릇이었다. 작은 기록이 큰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사실을 왕흥사가 보여 준다.

“강 건너 탑은 사라졌어도, 사리 한 알을 모시던 마음은 여전히 백제의 물길을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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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백제의 미소 – 서산 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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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백제 편 (총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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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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