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둔 지난주 화요일 아침, 저는 불은면 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으신 할머니 한 분이 손주가 깔아 주었다는 휴대전화 음성 도우미에게 읍내 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셨습니다. 화면에는 금세 또렷한 시각이 떠올랐지만, 그 시각이 한참 지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천천히 가방에 넣으시며 “이 기계는 모르면 모른다고를 안 해. 그게 제일 서운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이 하루 종일 귓가에 머물렀습니다.
![]() [코리안투데이] 강화 시골 버스정류장의 할머니와 휴대전화 © 장형임 칼럼니스트 |
우리나라에는 올해부터 인공지능을 다루는 기본법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법률 제20676호)은 2025년 1월 21일 제정되었고, 2026년 1월 22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어느덧 여덟 달이 흘렀습니다. 저는 이 법의 이름에 ‘발전’과 나란히 ‘신뢰’라는 낱말이 들어 있다는 점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기술을 키우는 일만큼 사람들이 기술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일도 함께 챙기겠다는 뜻으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섬에서 ‘믿을 수 있다’는 말은 조금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강화에서는 물때를 잘못 읽으면 갯벌에서 발이 묶이고, 배 시간을 잘못 알면 하루를 통째로 잃습니다. 그래서 이곳 어른들은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해 주는 사람을 더 믿으십니다. 오래 마을 일을 보신 이장님이 “그건 나도 잘 모르니 면사무소에 같이 물어봅시다”라고 하실 때 오히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할머니의 서운함도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려 보는 믿을 만한 인공지능의 첫 모습은 그래서 소박합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알려 주는 모습입니다. 버스 시간이 바뀌었을 수 있으니 정류장 안내판이나 군청 누리집을 한 번 더 확인해 보시라는 한마디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똑똑해 보이는 대답보다 정직한 망설임이 사람을 덜 헤매게 합니다. 섬의 삶에서는 그 한 번의 헤맴이 생각보다 큰 수고로 돌아오곤 합니다.
두 번째 모습은 자기가 누구인지 먼저 밝히는 인공지능입니다. 길상면에서 민박을 하는 이웃은 요즘 예약 문의에 자동 응답을 쓰는데, 처음에는 손님들이 사람인 줄 알고 긴 사연을 적었다가 나중에 머쓱해하더라고 했습니다. “기계라고 먼저 밝혀 두니까 손님들이 오히려 편해하더라고요”라는 민박 주인의 말이 저는 참 반가웠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 때 사람은 비로소 안심하고 말을 건넵니다. 섬마을 인심이 서로의 얼굴을 알아서 두터워지듯, 기계와 사람 사이의 믿음도 정체를 밝히는 데서 시작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세 번째는 기다려 주는 인공지능입니다. 강화에는 글씨가 작으면 읽기 어렵고, 말이 빠르면 따라가기 벅찬 어르신들이 많이 사십니다. 믿을 수 있는 기술이라면 가장 느린 사람의 걸음에 맞춰 한 번 더 천천히 설명하고, 끝내 풀리지 않을 때는 사람에게 이어 주어야 합니다. 법이 세운 신뢰의 뼈대가 도시의 사무실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섬마을 정류장에서도 느껴질 때, 그 법은 비로소 제 몫을 다하는 것이겠지요.
법은 울타리를 세워 주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믿을지는 결국 우리 각자가 정합니다. 저는 요즘 인공지능이 내놓은 답을 들으면, 이 답이 틀렸을 때 누가 곁에서 바로잡아 줄 수 있을지를 먼저 떠올려 봅니다.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으면 조금 더 믿고, 답하기 어려우면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서 ‘믿을 수 있는 인공지능’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할까요?
그날 할머니는 결국 다음 버스를 타고 읍내로 가셨습니다. 헤어지기 전 저는 군내버스 시간표를 찾아 큰 글씨로 보여 드렸고, 할머니는 “이건 사람이 찾아 준 거니까 믿어야지”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기술이 그 웃음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공지능이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하고,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고, 느린 이를 기다려 줄 수 있다면 섬사람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 것입니다. 기본법이 시행된 지 여덟 달, 저는 그 믿음이 거창한 약속보다 이런 작은 정직에서 자라난다고 믿습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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