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판 · 100년 전 오늘
1926년 8월 9일 월요일
🕙 10시 10분 —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26년 8월 9일 월요일, 한여름 늦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아침. 이날 경성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소식은 정작 경성이 아니라 현해탄 건너 도쿄에서 날아들었다. 도쿄지방재판소의 한 예심판사가 사직서를 냈다는 짧은 전보 한 줄. 그 뒤에는 경상북도 문경 출신 조선 청년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를 둘러싼 파문이 있었다.

그날의 경성
이날 경성에서 가장 뜨겁게 오간 이야기는 도쿄발 전보였다. 도쿄지방재판소 예심판사 다테마쓰 가이세이(立松懷淸)가 이날 사직서를 제출했고, 사표는 이틀 뒤인 11일 정식으로 수리됐다. 발단은 1년도 더 된 사진 한 장이었다. 1925년 5월, 다테마쓰는 예심 조사실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회유할 목적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붙어 앉아 책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몰래 촬영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이듬해인 1926년 7월, 이른바 ‘괴문서’와 함께 신문 지면에 흘러나오면서 일본 사법부와 정계 전체를 뒤흔드는 대형 스캔들, 세간에서 말하는 ‘괴사진 사건’이 되어버렸다.
조선 신문은 이 소식을 놓치지 않았다. 국사편찬위원회 근대사료 데이터베이스에 남은 기록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이달 중순부터 이듬해 1월 괴문서 게재 금지가 풀릴 때까지 거의 날마다, 때로는 1면과 2면에 동시에 이 사건을 실었다. 문제는 박열이 다이쇼 천황 황태자를 겨눈 대역죄인이라는 점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사전검열 아래, 대역죄인 부부에게 특혜를 베푼 판사 이야기를 얼마나 자세히 옮길 수 있을지는 신문사마다 매일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경성과 한반도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나고 자라 스무 살 무렵 도쿄로 건너간 조선 청년이었다. 그가 일본 왕실을 겨눈 대역죄로 재판정에 서고, 그 재판을 맡았던 판사가 옷을 벗는다는 소식은 조선 팔도 어디서든 예사롭지 않게 읽혔다. 총독부의 눈을 피해 다니던 조선 안의 사회주의·아나키즘 청년들 사이에서는 이 사건이 곧 식민지 사법 체계의 민낯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르내렸다. 박열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보름 전인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을 둘러싼 논란은 이 여름 내내 가라앉지 않았고, 남겨진 유골의 거취를 둘러싼 이야기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였다.

그날의 세계
같은 시각 도쿄에서는 사진 한 장이 정치판 전체를 흔들고 있었다. 담당 판사가 대역죄인 부부에게 지나친 편의를 봐줬다는 여론의 분노는 사법부를 넘어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으로까지 번져가는 형국이었다. 중국 남쪽에서는 국민혁명군을 이끄는 장제스가 지난달 시작한 북벌을 이어가며 이달 우창(武昌) 공략에 나섰고, 군벌 쑨촨팡(孫傳芳)에게 귀순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유럽 쪽에서는 지난 5월 아흐레간 이어졌던 영국 총파업이 노동조합회의(TUC)의 패배 선언으로 끝났지만, 폐업 상태에 놓인 탄광 노동자들의 싸움은 여전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여름을 넘기고 있었다.

경성 24시
월요일 아침, 경성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은 다시 가판대 앞에 섰다. 관공서와 회사들은 한 주를 시작했고, 남대문 시장과 종로 상점들은 늦더위 속에서도 하나둘 문을 열었다. 종로의 찻집과 서점가에서는 도쿄발 소식을 두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이 있었다. 박열이라는 이름은 이미 조선 청년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았다. 3년 전 대역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판결 당일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 사건 자체가 이미 조선 안팎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문경 산골 마을의 그의 가족들에게 이날 도쿄에서 벌어진 일이 어떻게, 언제 전해졌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00년의 거울
| 항목 | 1926년 | 2026년 |
|---|---|---|
| 재판·수사 기록 공개 | 예심판사 재량, 사전검열로 취사선택 보도 | 판결문 원칙 공개, 언론·사법 감시 제도화 |
| 수감자 처우 감시 | 내부 유출 없이는 알 길 없음 | 변호인 접견권·인권 감시 기구 상시 작동 |
| 정치범·식민지 출신 피고인 | 대역죄 등으로 가중 처벌, 옥사·의문사도 흔함 | 국적·사상에 따른 차별 처우 금지 원칙 |
100년 전 사진 한 장이 판사의 옷을 벗기고 내각까지 흔들었다는 사실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조선인 피고인 한 사람의 존엄이 철저히 부정당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나란히 앉아 책을 보던 그 짧은 순간이, 당대 사람들 눈에는 처벌받아 마땅한 ‘특혜’로 읽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시대의 민낯이었다.

내일, 1926년 8월 10일 화요일 아침 🕙 10시 10분에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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