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8년 가을, 평양성이 무너지던 그날 밤.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끌려가는 행렬에 섰다.
오늘날 우리는 시리아, 우크라이나, 미얀마에서 밀려나는 난민 행렬의 뉴스를 접하며 마음 아파한다. 그러나 1,350여 년 전, 한반도 북부와 만주 벌판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규모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700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가 무너지자, 그 백성은 흩어졌다. 누구는 당나라 강남으로 끌려갔고, 누구는 신라로 투항했으며, 누구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 정착했고, 또 누구는 훗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멸망은 끝이 아니었다. 고구려인들은 흩어진 자리마다 흔적을 남겼고, 그중 일부는 30년 만에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왜 이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가.
◆ 시대의 풍경
668년 9월, 나당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705년을 이어온 고구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정복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듬해인 669년, 당 고종은 고구려의 지배층과 유력 가문을 중심으로 유민 다수를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이들은 양쯔강과 화이허 이남의 강회 지역, 그리고 산남·경서 등 척박한 변경으로 흩어져 보내졌다. 정복지에 남겨두면 언제든 부흥운동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 강제 이주의 규모를 두고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지만, 왕족과 대신을 포함해 20만 명을 웃도는 인구가 당으로 끌려갔다는 것이 통설이다. 동시에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666년 무렵 이미 성 12개와 백성을 이끌고 신라로 넘어갔고, 왕족 안승은 신라에 투항해 익산 금마저에 자리 잡은 보덕국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바다 건너 일본으로 향한 이들도 있었다. 하나의 나라가 무너지며 그 백성이 최소 네 갈래 이상의 길로 흩어진 것이다.
“이적(李勣)이 보장왕과 왕자 복남·덕남, 대신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가 정국을 주도하던 시기. 고구려 유민의 강제 사민(徙民)은 이후 위구르·돌궐·투르크계 이민족을 내지로 옮겨 통제하던 당의 전형적 정복지 관리 방식이었다.
🗿 비잔틴제국
콘스탄티누스 4세 치세, 아랍의 콘스탄티노플 포위(674~678년경)를 막 견뎌낸 직후였다. 슬라브족 등 피정복민을 제국 내지로 이주시켜 재배치하는 정책이 유사한 시기에 병행됐다.
🌏 일본
덴지·덴무 천황 시대. 백제·고구려 유민을 적극 받아들여 율령국가 체제 정비에 활용했다. 도래인 집단은 문서 행정과 축성 기술을 전수하는 핵심 인력이 되었다.
[이미지: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의 4대 이주 경로 개념도]
⚔️ 그날의 현장
“669년 봄, 압록강 나루터에는 수천 대의 우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노인은 손자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애썼고, 병사들은 대열을 재촉했다. 강 건너는 다시 밟을 수 없는 고향, 강 이쪽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배길이었다.”
“같은 시각, 익산 금마저에서는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유민들이 새 궁궐터를 다지고 있었다. 나라는 사라졌지만, 왕의 자리와 오부(五部)의 체계는 그대로 옮겨왔다. 이들에게 재건은 곧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흩어진 고구려 유민의 삶은 그들 스스로 남긴 돌 위의 기록으로 오늘날 다시 확인된다.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산(泉男産) 묘지명이 대표적이다.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로 639년 태어난 그는 668년 나당연합군에 항복 후 당으로 압송되었는데, 그의 당 내 행적은 《구당서》나 《삼국사기》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무덤 앞 돌에 새겨진 이 묘지명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낙양 일대에서는 이 외에도 고을덕, 고현 등 고구려계 귀족의 묘지명이 잇따라 발굴되어, 강제 이주된 지배층 상당수가 당의 관료 체제에 편입되어 살아갔음을 보여준다.
신라로 넘어간 이들의 삶은 조금 다른 궤적을 그렸다. 문무왕은 왕족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책봉하고 금마저(현 전북 익산)에 자리를 내주었다. 보덕국은 고구려와 같은 오부 체제를 유지하며 나당전쟁에도 참전했지만, 신라 중앙집권화가 진행되며 결국 폐지되었고 남은 유민들은 남원경으로 옮겨졌다. 정복자에게 이용되면서도 끝내 독자성을 지우지 못하고 흡수된 이 과정은, 약소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거대 국가 체제 안에서 겪는 전형적인 운명을 보여준다.
그러나 가장 극적인 반전은 만주 벌판에서 일어났다. 당에 끌려갔던 유민들 중 일부가 30년 만인 698년, 대조영의 지휘 아래 요서 영주를 벗어나 동모산에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다. 국호는 진(振), 대조영은 스스로 고왕(高王)이라 칭했다. 이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흩어졌던 고구려 정체성이 하나의 국가로 재결집한 사건이었다. 705년 당이 이 건국을 인정하면서, 디아스포라는 마침내 정치적 실체로 되돌아왔다.
시대
668년~716년
핵심 인물
대조영, 안승, 고약광
핵심 사건
4대 이주(당·신라·발해·일본)
영향
발해 건국으로 정체성 재결집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당으로 끌려간 유민 대다수는 시간이 흐르며 한족 사회에 동화되었고, 발해로 재결집한 세력은 그중 일부에 불과했다는 것이 국내외 학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강제 이주 규모(20만 명 vs 3만여 호)와 신라 유입 인구 규모도 사료마다 편차가 있어 여전히 논쟁 중이다.
대안적 견해
중국 강남으로 이주된 고구려 유민이 오늘날 중국 소수민족인 먀오족 형성의 한 축이 되었다는 주장이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다만 이는 언어·유전학적 근거가 제한적이어서 학계 다수의 지지를 받는 정설은 아니며, 앞으로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한 가설로 다뤄진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21세기에도 국가의 붕괴와 전쟁은 여전히 대규모 인구 이동을 낳는다. 시리아 내전으로 1천만 명 이상이 고향을 떠났고,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전역에 수백만 명의 피란민을 흩뿌렸다. 고구려 유민의 역사는 이런 오늘의 뉴스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 정복자의 필요에 따라 강제로 옮겨지는 사람들, 그럼에도 공동체의 정체성을 붙들고 새로운 땅에서 다시 뿌리내리는 사람들.
동시에 발해 건국은 디아스포라가 단순한 패배자의 역사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흩어진 지 30년 만에, 유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국가를 세웠다. 오늘날 재외동포 750만 명이 세계 각지에서 한국과 연결된 정체성을 지켜가는 모습은, 어쩌면 1,300여 년 전 이 디아스포라의 가장 오래된 후예일지도 모른다.
| 구분 | 고구려 유민 시대 | 현재 |
|---|---|---|
| 이주 원인 | 국가 멸망, 정복자의 강제 사민 | 내전, 분쟁, 정치적 박해 |
| 정착 방식 | 관료 편입, 번속국 수립, 집단촌 형성 | 난민 캠프, 재정착, 디아스포라 커뮤니티 |
| 정체성 | 오부 체제·왕실 계승으로 정체성 유지, 발해 건국 | 750만 재외동포 네트워크, K-컬처로 정체성 확장 |
[이미지: 고구려 멸망부터 오늘날 재외동포까지 이어지는 디아스포라 시간선]
📚 더 깊이 알아보기
-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의 고마신사(高麗神社)는 지금도 고구려 유민 후손 고약광을 신으로 모시며 매년 제례를 지낸다.
- 《신찬성씨록》에는 고구려계로 확인되는 씨족이 52개 등재되어, 일본 고대 지배층 형성에 도래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 낙양 일대에서 발굴된 천남산·고현 등 고구려 유민 묘지명은 정사에 없는 개인의 생애사를 보여주는 독보적 자료로, 지금도 새로운 묘지명이 간헐적으로 발굴되고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나라는 무너져도 사람은 흩어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고구려의 후예들은 당의 강남에서, 신라의 익산에서, 만주의 동모산에서, 일본의 무사시노 벌판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다시 나라가 되었다.
“흩어진 불씨도, 모이면 다시 타오른다 —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증명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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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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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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