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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 정전 5분, 가족의 기억을 지킨 건 곰 인형 태디였다

기사입력 기사번호 54011

정전 5분이면 충분했다. 냉동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푸른 얼음 조각 하나가 녹아내리면, 한 가족의 평범한 아침이 통째로 사라질 뻔했다. 신간 그림동화 「곰 인형 태디와 친구들」은 이 짧은 위기를 빌려, 사랑은 큰 사건이 아니라 서로를 챙기는 손짓 속에 쌓인다는 사실을 그려낸다. 곰 인형 태디가 지키려 한 것은 대단한 보물이 아니라 아침 식탁에서 오간 사소한 손길이다. 정전이라는 흔한 사고를 이야기의 문턱으로 삼은 설정부터가, 이 그림책이 어디를 겨냥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애착 인형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야기는 전 세계 아동문학에서 오래된 계보를 이룬다. 곰돌이 푸, 코듀로이 같은 인형 캐릭터가 아이의 성장과 상상력을 대변해 온 것처럼, 국내 창작 그림책 시장에서도 인형 판타지물은 꾸준히 나온다. 다만 대개는 인형과 아이 개인의 우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작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형이 가족 구성원 각자의 무심한 배려를 목격하고 지키는 관찰자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할머니가 손수 짠 모시 천이라는 전통 소재를 서사의 배경으로 삼은 것도 눈에 띈다. 모시는 여름 옷감으로 익숙하지만, 그 위에 가족의 순간들을 수놓듯 펼쳐 놓은 설정은 세대를 잇는 손길이라는 이미지를 더한다.

저자 윤강후는 초등학생 작가다. 평소 책 읽기를 즐기며, 실제로 자신이 오래 아껴온 곰 인형 태디와 여러 인형에서 이야기의 출발점을 찾았다. 곁을 지켜온 애착 인형에게서 주인공을 떠올리고, 그 인형이 밤마다 벌이는 신비로운 모험을 이야기로 완성했다. 실물 인형에 대한 애정이 창작의 동력이 됐다는 점은 이 작품에 특유의 생생함을 준다. 가상의 캐릭터가 아니라 작가의 방 한켠을 지켜온 존재라는 사실이, 이야기 속 인형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설득력을 더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태디, 긴 팔을 가진 나무늘보, 헤엄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는 승죽 연어님, 세 캐릭터가 있다. 이들은 한여름 밤 냉동실 아래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푸른 얼음 조각을 발견하면서 모험에 뛰어든다. 원고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모두 잠든 한여름 밤, 곰 인형 태디는 냉동실 아래에서 파르르 떠는 푸른 얼음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별처럼 깜박이던 얼음에 손을 대자 따뜻한 아침 식탁이 나타났습니다. 얼음 속에 봉인된 기억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다. 아빠는 엄마의 물컵을 채우고, 누나는 동생의 물컵을 말없이 챙겨 주었던, 누구나 지나쳤을 법한 순간이다. 정전으로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세 인형은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힘을 보탠다.

목차는 저자 소개, 본편 「곰 인형 태디와 친구들」, 작가의 말 3부로 짜였다. 별도의 챕터 구분 없이 단일 서사로 이어지는 구성이라 취학 전후 어린이가 부모와 함께 한 호흡에 읽기 좋다. 정전이라는 일상적 소재로 이야기를 열어, 아이가 자기 집 냉장고와 식탁을 떠올리며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방식도 이 나이대 독자에게 맞춤한 장치다. 부모 세대에게는 할머니의 모시 천이 불러오는 정서가, 아이 세대에게는 인형들의 모험이 각각 다른 층위에서 읽히도록 짜인 셈이다.

얼음이 녹아 기억이 사라질 위기에서 세 캐릭터가 힘을 모으는 후반부는, 협동과 배려라는 주제를 자연스럽게 체득시키는 지점이다. 별도의 교훈 문구를 앞세우지 않고도 이야기 구조 자체가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설교보다 서사를 택한 그림책 계보에 선다. 나무늘보의 긴 팔과 연어님의 헤엄이라는, 언뜻 쓸모없어 보이는 특징이 위기의 순간 각자의 역할로 바뀌는 대목도 어린 독자에게 협동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던 캐릭터가 결정적 순간에 쓸모를 찾는 전개는, 아이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은근히 심어준다.

다음 관전 포인트는 두 가지다. 모시 천이라는 전통 소재가 앞으로 다른 인형 캐릭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정전이라는 도입부 장치가 후속 이야기에서도 반복될지 여부다. 「곰 인형 태디와 친구들」은 윤강후 지음, WIA Book 출간으로 2026년 8월 1일 PDF 형식 전자책으로 선보였으며 정가는 5,000원이다. 도서 상세 페이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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