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을 공경한다는 것은 단순한 의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족보와 제사는 불편한 관습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질서를 지켜온 장치였다. 이 글은 전통을 버리는 것이 과연 발전인지, 뿌리를 기억하는 삶이 왜 흔들리지 않는지를 차분히 성찰하게 한다.
![]() [코리안투데이] 머릿돌 109. 존조경종이 오늘을 지탱하는 이유 © 지승주 기자 |
최근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좋은 대학을 나와 국가기관의 장까지 지낸
칠십대 고위 공직자 출신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상 산소를 다 파서 화장해
강물에 뿌려 버릴까 생각 중이야.”
이유를 묻자
“해마다 묘사니 제사니 부담스러워서”라는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이는
역사 교사를 거쳐
대도시 공립고등학교 교장까지 지낸 사람인데
“제사 때문에 귀찮아 못 살겠다”고 불평했다.
이들은 무지해서일까.
아니다.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배웠다고 불리는 식자층이다.
그래서
당신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이 정도라면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이미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족보를 정리해 온 나라다.
물론 위조와 허례의 문제도 있었지만,
족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의 후손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정체성의 지도였다.
타지에서
같은 성씨를 만나
몇 마디만 나누면
어느 할아버지의 갈래인지,
몇 촌인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이유다.
중국과 문화적으로 가까웠지만
그들조차
우리만큼 족보를 중시하지 않았다.
촌수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한 중국의 역사 전공 교수가
우리의 촌수 개념을 듣고
“참 훌륭하고 정교한 인간관계 체계”라며
감탄한 적도 있었다.
1981년 겨울,
세계적인 사회학자 보르노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앞으로 잘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다른 건 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한국인의 족보 전통을 잘 지키십시오.”
기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낡고 불편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왜 서양 학자는 높이 평가했을까.
그는
족보가
국가와 사회,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개인을 도덕적으로 붙드는
강력한 장치라고 보았다.
우리 조상들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할 때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행동이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훗날 내 후손에게 짐이 되지는 않는가.”
이 질문은
사람을 함부로 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말은 조심스러웠고,
행동은 신중했다.
그러나
조상을 지우고
뿌리를 끊어버린 사회에서는
이 질문 자체가 사라진다.
오늘날 범죄와 무질서가 늘어나는 이유를
학교나 제도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이유다.
사람의 기본은
집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누군가를 욕할 때
“누구 집 자식이 저 모양이냐”고 말하지,
“어느 선생 제자냐”고 말하지 않는다.
자기가
누구의 자식이며
어떤 가문의 후손인지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살기 어렵다.
예전에는
동족 마을에서 살며
문밖을 나서면
모두가 할아버지, 삼촌, 형제였다.
눈이 곧 감시였고,
관계가 곧 규범이었다.
훌륭한 조상이 있으면
그 삶을 기록하고,
서원을 세워
후손의 교육 자료로 삼았다.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라는
책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도시로 흩어지고,
출신도 뿌리도 모르는 사회에서는
사람은 쉽게 익명 속에 숨는다.
말은 가벼워지고,
행동은 즉흥적이 된다.
조상을 공경하는 전통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모든 전통을 버리는 것이
과연 발전일까.
좋은 전통마저
낡았다는 이유로 버린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자기 부정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오늘 어떤 선택 위에 서 있는가.
조상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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