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선은 38년 공직생활 동안 “왜 아직도 승진을 못 했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선뜻 답하지 못했다. 인사발령 방송에 이름이 끝내 불리지 않던 날, 아무도 없는 한강 자전거길을 달리며 소리 없이 울었다. 다음 날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다시 출근했다.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는 승진이 아니라 견딤으로 시간을 기억한 사람의 기록이다.
공직 에세이는 흔히 성취의 연대기로 쓰인다. 몇 급에서 몇 급으로, 어느 자리에서 어느 자리로 올라갔는지가 줄거리를 이룬다. 이 책은 그 틀을 벗어난다. 9급에서 8급까지 9년, 7급에서 6급까지 14년이 걸린 승진 지연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늦게 피는 꽃과 늦게 인정받는 사람을 나란히 놓고, 속도가 아니라 완주를 삶의 척도로 삼는다. 승진이 늦은 이가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은, 성과와 속도를 앞세우는 최근의 자기계발 서사와 뚜렷이 갈라선다. 최근 출판 시장에서 무명의 개인이 자신의 생업과 일상을 담담히 기록한 에세이가 꾸준히 독자를 찾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저자와 이름도 얼굴도 몰랐던 독자가 비슷한 시기를 지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도 이런 종류의 글이 가진 힘이다.
저자 최희선은 1987년 스물두 살에 광주군 남종면사무소에서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하남시에서 38년간 보건, 위생, 복지, 회계, 감염병 대응 업무를 두루 맡았고 기술서기관으로 정년퇴직했다. 만삭의 몸으로 야간 단속을 나갔고, 퇴근이 늦어지면 어린 딸은 보건소 한쪽에서 잠들어 엄마를 기다렸다. 민원과 감사, 코로나19 최전선까지 거친 뒤 퇴직을 앞두고 유방암 진단과 치료를 받으며 삶의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 시간을 지나며 열심히 사는 일 못지않게 건강하게 살아가는 일의 무게를 깨달았다고 저자는 적는다.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12부로 짜였다. 1부 “불리지 않는 이름에도 봄은 온다”는 2012년 승진 누락의 순간에서 출발하고, 2부 “스물두 살, 공무원이 되다”와 3부 “엄마도 공무원이었습니다”는 신입 시절과 육아를 병행한 나날을 그린다. 4부 “상처도 경력이 되었다”는 가족 안에서 겪은 갈등과 화해를, 5부와 6부는 하남시 행정 현장과 7급 승진 이후의 시간을 다룬다. 8부는 보건직 최초로 희망복지팀장을 맡은 과정을, 9부 “코로나19, 길었던 겨울”은 보건직으로서 감염병 최전선에 섰던 기록이다. 10부 “드디어 불린 이름”은 6급과 사무관, 서기관 승진이 뒤늦게 찾아온 순간을 담고, 11부는 암 진단 이후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과정을, 12부는 주변 사람들이 전해온 편지로 마무리한다.
독자 대상은 좁지 않다. 승진이나 평가에서 뒤처졌다고 느끼는 직장인, 공직에 몸담은 이들, 일과 육아와 부모 돌봄을 동시에 짊어진 여성 독자가 특히 자신의 경험과 겹쳐 읽을 만하다. 저자 스스로 “성공한 공무원의 이야기도, 특별한 영웅의 이야기도 아니다”라고 밝힌 만큼, 이 책은 넘어지고 견디고 다시 일어난 한 사람의 평범한 기록에 가깝다. 화려한 승진기가 아니라 버텨낸 하루하루의 목록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의 독자에게는 위로보다 앞서 공감이 먼저 가닿을 법하다.
저자는 퇴직 이후를 이렇게 적는다. “나는 이제 공무원이라는 이름은 내려놓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내려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이들에게 이렇게 건넨다. “우리 모두의 삶은 저마다 속도가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 두 문장은 이 책이 위로를 표방하는 지점과, 그 위로가 어디서 길어 올려졌는지를 함께 보여준다.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분명하다. 저자가 퇴직 후 “위로하는 글,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갈지, 그 다음 기록이 이 책의 문제의식을 어떻게 이어가는지다.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는 저자 최희선의 이름으로 WIA Book이 2026년 7월 30일 출간했다. 정가 1만 원, EPUB3·PDF 전자책으로 서비스되며, 도서 상세 페이지(https://wiabook.com/?post_type=download&p=446659)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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