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판
100년 전 오늘
10시 10분 – 시계가 미소 짓는 시간, 100년 전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1925년 10월 14일 수요일
1925년 10월 14일 수요일, 경성 남산은 아침 일찍부터 부산했다. 내일 열릴 조선신궁 진좌제를 하루 앞두고 산기슭 곳곳에 경관들이 늘어섰다. 이틀 전 경성역에 닿은 칙사 일행은 남산 중턱 신궁 경내에 머물며 마지막 채비를 서둘렀다. 거리마다 늘어선 순사들 사이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서로 눈짓만 주고받았다.

그날의 경성
당시 조선 내 신문들은 이틀 뒤로 다가온 조선신궁 진좌제 준비 상황을 연일 전했다. 지난 9월 24일 일본 내각은 고시 제9호로 진좌제 날짜를 10월 15일로, 해마다 치르는 예대제는 10월 17일로 못 박아 두었다. 그리고 이틀 전인 13일, 이세신궁에서 건너온 거울과 메이지 천황이 지녔던 검을 받든 소노이케 사네야스 장전차장 일행이 경성역에 내렸다. 역 앞에는 이들을 맞으려는 관리와 학생, 시민이 줄지어 섰다.
14일인 이날은 진좌제를 하루 앞두고 경계가 한층 세졌다. 경성 시내 경찰관이 사실상 총출동해 신궁으로 오르는 길목과 남산 일대를 지켰다. 15일 당일에는 군대와 학생들까지 동원해 소노이케 일행의 행렬을 성대하게 맞을 채비였다. 신궁 경내에서는 마지막 정비가 분주하게 이어졌고, 남대문에서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이날부터 통행이 부쩍 조심스러워졌다.

경성과 한반도
이날 조선신궁을 향한 채비는 경성만의 일이 아니었다. 전국 각지 관공서와 학교에는 신궁 봉축에 맞춰 참배 대열에 설 채비를 갖추라는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한편 남산에서 멀지 않은 이촌동 일대는 두 달 전 을축년 대홍수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채였다. 여름 두 차례 물난리로 삶터를 잃은 이재민 4만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이촌동 판잣집에서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고, 신문사와 청년회가 모은 구제금과 조선총독부 예비금이 뒤섞여 복구 자금으로 쓰이는 형편이었다. 화려한 신궁 준비와 아직 끝나지 않은 수해 복구가 같은 하늘 아래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날의 세계
같은 날 유럽 스위스 로카르노에서는 벨기에·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일곱 나라가 모여 국경 안정과 평화를 논의하는 회의가 이레째 이어지고 있었다. 좀처럼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날 회의장에 나타나면서 회의는 막바지로 향했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7년, 로카르노에서는 독일을 국제사회로 다시 불러들이는 방안이 논의되는 중이었다. 한편 프랑스가 위임통치하던 시리아에서는 다마스쿠스로 반군이 밀고 들어오면서 긴장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며칠 뒤 대대적인 포격으로 맞섰다. 식민지와 위임통치 아래 놓인 곳마다, 저항과 억누름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경성 24시
아침 일찍부터 경성 시내 몇몇 학교에서는 정규 수업 대신 신궁 참배 행렬 예행연습이 잡혔다. 교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이 줄지어 남산 방향으로 향했고, 교사들은 대열 앞뒤를 오가며 걸음을 맞췄다. 한낮이 되자 거리에는 순사들의 호루라기 소리가 자주 울렸다. 청년회 회원들도 남산 인근에 모여 이튿날 쓸 깃발과 등을 손질했다. 저물녘, 예행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학생들 옆으로 이촌동 쪽에서 온 이재민 아이들이 지나쳤다. 같은 골목이었지만 두 무리의 걸음걸이는 사뭇 달랐다.

100년의 거울
| 항목 | 1925년 10월 14일 | 2025년 오늘 |
|---|---|---|
| 학교와 국가행사 | 수업 대신 참배 예행연습 동원 | 학사 일정과 분리된 자율 참여 |
| 복장 | 획일적 교복, 정해진 대열 | 자율 복장, 개인 선택 |
| 재해 복구 | 신문사·청년회 모금에 크게 의존 | 국가 재난관리 시스템 상시 가동 |
| 도시 경비 | 행사 하루 전부터 경찰 총동원 | 사안별 선택적 경비 배치 |

내일을 기다리며
내일 1925년 10월 15일, 남산 조선신궁에서 진좌제가 거행된다. 같은 날 경성역사 새 건물도 문을 열 예정이었다. 내일 아침 🕙 10시 10분,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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