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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 고구려

[역사는 살아있다 – 고구려 편] 제23화: 돌에 새긴 천년의 삶 — 고분벽화가 전하는 하늘과 땅

기사입력 기사번호 54626
高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고구려 편

제23화: 고구려 고분벽화 – 돌에 새긴 천년의 삶

캄캄한 돌방의 벽에 씨름꾼 두 사람이 여전히 맞붙어 있다. 1,600년째, 아무도 이기지 못한 채로.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야산 아래, 흙과 돌로 봉분을 쌓은 무덤방 안에는 사진 한 장 없던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색으로 남겨 놓았다. 사냥하고, 춤추고, 씨름하고, 잔치를 벌이던 그날의 장면이 안료가 마르기도 전처럼 선명하다. 문자 기록이 왕과 전쟁을 말할 때, 벽화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옷깃과 몸짓을 말해준다.

2004년 유네스코는 이 벽화 무덤들을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런데 같은 무덤을 놓고 남과 북, 그리고 중국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등재를 신청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벽 속에 갇힌 그림 한 장이 왜 21세기 국제 정치의 쟁점이 되었을까.

◆ 시대의 풍경

고구려는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약 300년에 걸쳐 오늘날의 만주 지안과 평양·남포 일대에 돌방무덤(석실분)을 쌓고 그 안쪽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 중국 지안 지역과 북한 평양·남포 지역을 합쳐 1만 기가 넘는 고구려 무덤이 확인되었지만, 그중 벽화가 남아 있는 것은 약 90여 기에 불과하다. 그만큼 벽화 고분은 왕족이나 최상위 귀족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이었다.

벽화의 주제는 시기마다 달라진다. 4세기 중엽에는 무덤 주인의 생전 생활을 재현한 풍속화가 주를 이루었고(황해도 안악3호분의 250여 명 대행렬도가 대표적이다), 5세기에는 씨름·무용·수렵 같은 인간 군상의 역동적인 장면이 정점을 이루었으며(지안의 각저총·무용총),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는 인물화가 사라지고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도가 벽 전체를 채우는 방식으로 바뀐다(남포의 강서대묘). 300년 동안 고구려인의 시선이 ‘이승의 삶’에서 ‘하늘과 사후 세계’로 옮겨간 궤적이 그대로 벽에 남은 셈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 지어 모여 서로 노래하고 즐긴다.”

– 출처: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 (고구려인의 생활상을 전하는 기록으로, 무용총 무용도·주악도의 배경이 된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3~6세기) 둔황 막고굴에서도 비슷한 시기 불교 벽화가 조성되었으나, 고구려 벽화는 불교보다 토착 사신 신앙과 생활 풍속이 중심이라는 점에서 뚜렷이 구별된다.

🗿 유럽/중동

강서대묘 사신도가 그려지던 6세기 후반, 이탈리아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가 완성되고 있었다. 둘 다 ‘통치자의 사후 영원성’을 벽면 전체에 새긴다는 점이 닮았다.

🌏 기타 지역

일본 나라현 다카마쓰즈카 고분(7세기 말~8세기 초) 벽화 속 여인 군상은 고구려 벽화 양식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고분 현실(玄室) 사신도 배치도

천장 – 해와 달, 별자리

북벽 – 현무 (北)

남벽 – 주작 (南)

동벽·청룡

서벽·백호

무덤 주인의 관(棺)

[이미지: 강서대묘 현실의 사방(四方) 사신 배치 – 북(현무)·남(주작)·동(청룡)·서(백호), 천장(해·달·별)]

⚔️ 그날의 현장

“기름등잔 하나가 좁은 돌방 안을 밝힌다. 화공은 무릎을 꿇은 채 붓을 든 손을 멈추지 않는다. 서벽에는 이미 호랑이를 향해 몸을 돌려 활을 쏘는 기마 무사가 그려졌다 — 말은 전속력으로 달리는데 사냥꾼의 상체는 뒤를 향한, 이른바 ‘파르티안 사법(射法)’이다.”

“‘선왕께서 살아 계실 때 이 산을 이렇게 달리셨지.’ 곁에서 지켜보던 스승 화공이 나직이 말한다. 며칠 뒤 이 방은 영원히 봉해질 것이다. 그러나 붓끝의 화살은 앞으로 천 년이 넘도록 그 호랑이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지안의 각저총(角抵塚)은 이름 그대로 ‘씨름 무덤’이다. 무덤방 동쪽 벽에 두 장사가 샅바를 맞잡고 힘을 겨루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심판 격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옆에 서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전통 씨름과 기술 구도가 놀라울 만큼 비슷해, 이 벽화 한 장이 씨름의 역사가 최소 1,6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물증 역할을 한다.

바로 옆의 무용총(舞踊塚)은 더 풍부하다. 북벽에는 무덤 주인이 승려로 보이는 손님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동벽에는 긴 소매 옷을 입고 열을 지어 춤추는 무용수들, 서벽에는 산과 들을 내달리며 사슴과 호랑이를 쫓는 수렵도가 그려져 있다. 이 수렵도의 말 탄 사냥꾼이야말로 고구려 벽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교과서와 우표, 심지어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영상에도 등장했다.

더 앞선 시기인 4세기 중엽 안악3호분(황해남도)에는 부엌, 우물, 방앗간, 마구간까지 그려져 있어 벽화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무덤 주인이 저승에서도 이승과 똑같이 풍족하게 살기를’ 바라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250여 명이 등장하는 대행렬도는 그 규모만으로도 고구려 귀족 사회의 위세를 실증하는 사료다. 이렇게 4세기의 ‘생활풍속화’에서 5세기의 ‘풍속+장식 혼합’, 6~7세기의 ‘사신도 전용’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고구려인의 내세관이 구체적 삶의 재현에서 추상적 우주 질서로 옮겨갔음을 말해준다.

시대

4세기 중엽~7세기 초

핵심 유적

각저총·무용총·강서대묘

핵심 소재

사신도·수렵도·씨름도

현재 지위

유네스코 세계유산(2004)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한국 학계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독자적 천하관과 사신 신앙을 지닌 고구려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보며, 2004년 남·북한이 협력해 세계유산 등재를 이끌어낸 것도 이런 인식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사례로 평가한다.

논쟁적 견해

2002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은 지안 일대 고구려 유적을 ‘중국 동북지방의 지방 정권 역사’로 규정하려 했다. 이 때문에 2004년 세계유산 등재 당시 중국의 공동등재 제안을 북한이 거절하고, 남측이 외교적으로 이를 지원하는 이례적 국면이 벌어졌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1,600년 전 화공은 안료와 돌벽만으로 자신의 시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었다. 오늘날 우리는 클라우드에 사진 수만 장을 저장하지만, 정작 100년 뒤 후손이 그 파일을 열어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동시에 이 벽화는 ‘문화유산이 곧 외교’라는 사실도 일깨운다. 무덤 한 기의 소유권과 해석을 둘러싼 남·북·중의 긴장은 지금도 계속되는 동아시아 역사 갈등의 축소판이며,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3D 가상전시관으로 이 벽화들을 디지털 복원해 공개하는 것도 실물에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유산을 지켜내려는 시도다.

구분 고구려 시대 현재
4세기 벽화 생활풍속도 (부엌·행렬·마구간) 기록사진·다큐멘터리
5세기 벽화 씨름·무용·수렵 (역동적 인물화) 스포츠·공연 아카이브 영상
6~7세기 벽화 사신도 (추상적 우주관) 유네스코 세계유산·디지털 복원

천 년을 건너온 붓질 – 벽화에서 디지털로

5~6세기 고분 벽화 돌방 속 안료

3D 가상전시관 · 디지털 복원 21세기 화면 속 안료

[이미지: 지안·평양의 벽화 원본이 훼손과 접근 제한 속에서 3D 가상전시관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 더 깊이 알아보기

  • 무용총 수렵도의 ‘파르티안 사법'(질주하며 뒤돌아 활을 쏘는 자세)은 중앙아시아 유목 기마민족과의 문화적 연결성을 보여주는 단서로 연구된다.
  • 안악3호분에는 무덤 주인의 정체를 둘러싼 논쟁이 있다 — 묵서명에는 중국계 망명객 동수(冬壽)로 적혀 있지만, 고구려 왕(고국원왕)의 무덤이라는 학설도 꾸준히 제기된다.
  •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의 ‘고구려 고분벽화 3D 가상전시관’에서는 실물 접근이 어려운 지안·평양 지역 벽화를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국경도, 왕조도, 심지어 무덤을 봉인한 돌문마저도 결국은 무너지거나 열린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마르지 않은 안료로 남겨진 씨름꾼의 몸짓, 사냥꾼의 화살, 사신의 눈빛은 그대로 남는다.

“말은 흩어져도 그림은 남는다 — 고구려는 그렇게 여전히 벽 속에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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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고구려와 당의 문화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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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온달과 평강공주 – 신분을 넘은 사랑

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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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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