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국가 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1,600년 전 고구려는 그 일을 세 번 해냈다.
서울과 세종, 부산과 수도권. 오늘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어디에 도시를 세울 것인가”를 놓고 논쟁한다. 그런데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 동안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국내성에서 평양 안학궁으로, 다시 평양 장안성으로 왕도를 세 차례나 옮겼다.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매번 방어 전략, 경제 기반, 왕권의 성격까지 함께 바뀌는 대개조였다.
산성 하나에 웅크려 버티던 부족연맹체가 어떻게 동아시아 최강국의 계획도시를 설계할 수 있었을까. 그 답은 평양 대동강 변, 지금은 절반쯤 잊힌 흙더미 속에 남아 있다.
◆ 시대의 풍경
고구려의 왕도는 늘 두 개의 성이 짝을 이루었다. 평상시 정치와 생활의 중심인 ‘평지성’과, 전쟁이 나면 온 백성이 피신하는 ‘산성’. 국내성 시대(서기 3년 무렵~427년)에는 통구하와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의 국내성(둘레 약 2.7㎞ 석성)이 평지성을, 서북쪽 2.5㎞ 지점의 환도산성이 방어성을 맡았다. 환도산성에서는 왕궁으로 추정되는 한 변 90여m의 대형 건물지와 팔각형 건물지 두 기, 병영터와 연못까지 확인되어, 이미 이 시기부터 도성이 정교하게 기능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환점은 장수왕 15년(427년)이었다. 왕은 수도를 압록강 상류의 산악분지 국내성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야 평양으로 옮겼다. 새 왕궁 안학궁(둘레 약 2.4㎞ 방형 토성)을 짓고, 그 배후에 고구려 최대 규모의 산성인 대성산성(둘레 20리가 넘는)을 두었다. 평시엔 안학궁에서 정무를 보다가 유사시 대성산성으로 옮기는 체제였다. 이후 평원왕 28년(586년), 고구려는 다시 한번 도성을 재편해 장안성(오늘날의 평양성)으로 완전히 옮겼다. 552년 축성을 시작해 593년 완공된 이 성은 둘레 약 23㎞에 이르는 초대형 평산성으로, 북성·내성·중성·외성의 4중 구조 안에 주민 전체를 수용할 수 있었다.
“평강왕이 도읍을 장안성으로 옮겼다(平原王 移都長安城).”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5세기 화북은 북위(北魏)가 통일, 평성·낙양으로 천도하며 조방제(條坊制) 격자도시를 실험하던 시기. 고구려의 평지성·산성 체계는 이와는 다른 독자 노선이었다.
🗿 유럽/비잔틴
같은 5세기, 콘스탄티노플은 언덕과 해안선이 복잡해 완전한 격자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열주대로 ‘메세’를 축으로 도시를 조직했다. 서로마는 이 무렵 게르만족에게 무너지고 있었다.
🌏 일본
일본은 이보다 한참 뒤인 7세기 말~8세기에야 후지와라쿄·헤이조쿄 등 당나라식 조방제 도성을 세운다. 고구려의 도성 경험이 백제를 거쳐 일본 고대 도성 설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본다.
[이미지: 고구려 도성 체계의 변천 – 평지성(안학궁)과 산성(대성산성)의 결합 구조]
⚔️ 그날의 현장
“586년 늦여름, 대동강 물안개를 뚫고 새 왕성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34년째 이어진 공사, 삼대에 걸친 왕들의 숙원이었다. 성벽 아래로는 낙타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 대륙 저편에서 온 상단이 시장 골목으로 짐을 부리는 소리다.”
“《삼국사기》 온달 열전은 전한다. 평강공주가 궁을 나와 시장(市)에서 직접 말을 골라 산 뒤, 온달에게 정성껏 먹여 명마로 길러냈다고. 왕궁 담장 바로 밖에서 공주가 흥정을 벌였다는 이 짧은 기록은, 장안성 시장이 신분을 넘나드는 도시 생활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준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장안성의 시가지는 중국의 조방제(條坊制)를 응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둑판형 가구(街區) 구획, 이른바 ‘기전(箕田)’으로 나뉘어 있었다. 성 전체는 왕궁이 자리한 내성, 관청이 모인 중성, 일반 주민이 사는 외성, 그리고 배후 방어를 맡은 북성으로 4중 분리되어 있어 왕권·행정·민생·군사가 공간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계획도시였다.
이는 갑작스러운 발상이 아니라 국내성-환도산성 시대부터 이어진 축적의 결과였다. 환도산성 발굴에서 확인된 정방형 대형 건물지, 팔각형 건물지 두 기, 점장대(지휘소), 병영터, 연못 등은 이미 3세기 무렵부터 산성이 단순 방어시설을 넘어 행정·군사 복합기능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평양 천도 이후 안학궁(방형 토성, 둘레 약 2.4㎞)과 대성산성이 이 체계를 계승했고, 장안성은 마침내 평지성과 산성의 장점을 하나의 성 안에 통합한 ‘평산성(平山城)’으로 완성됐다.
경제적으로도 평양은 국내성 시절보다 훨씬 유리했다. 대동강을 낀 평야지대는 농업 생산력이 높았고, 하천과 바닷길을 통한 교역이 가능했다. 《삼국사기》 기록과 후대 문헌들은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대한 조공무역뿐 아니라, 초원길과 연결된 대상(隊商) 교역을 통해 낙타 같은 물자까지 들여왔음을 시사한다. 시장은 이제 왕도의 부속시설이 아니라 국가 경제의 심장이었다.
천도 연도
427년(장수왕) / 586년(평원왕)
핵심 유적
안학궁 · 대성산성 · 장안성
도성 규모
장안성 둘레 약 23㎞
구조 원리
평지성+산성의 이중 도성
🔍 학계의 시각 – 안학궁은 정말 고구려 왕궁인가
주류 견해
한국 학계 다수설은 안학궁을 427년 장수왕이 세운 고구려 왕궁으로 본다. 대성산성과의 배후 관계, 문헌 기록의 정합성이 근거다.
대안적 견해
일본 학계 일부와 최근 국내 일부 연구자는 출토 기와 양식을 근거로 안학궁을 고려시대(고려 서경 궁궐, 정종 대 폐궁설)로 보는 재해석을 제기한다. 논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세종특별자치시가 설계될 때도, 서울이 재난 대비 도시계획을 짤 때도 원칙은 같다 — 평상시 기능과 위기 시 기능을 분리해 설계하라. 고구려가 1,600년 전 평지성과 산성을 짝지은 이유도 다르지 않다. 행정·경제 중심지는 열려 있어야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즉시 방어 체제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오늘날 스마트 시티 담론이 강조하는 ‘회복탄력성(resilience)’과 ‘기능 분리 구역제(zoning)’는 사실 장안성의 내성·중성·외성 4중 구조 안에 이미 원형이 담겨 있다. 왕궁·행정·주거·방어가 한 성 안에서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설계 철학은, 재난과 팬데믹 이후 도시 회복력을 다시 고민하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 구분 | 고구려 시대 | 현재 |
|---|---|---|
| 도시 구조 | 평지성(정무)+산성(방어) 이중 체계 | 행정도시+재난대피 인프라 분리 설계 |
| 공간 구획 | 내성·중성·외성 4중 구획, 방리제 | 용도지역제(주거·상업·공업 zoning) |
| 유통·상업 | 조공무역+대상 사무역, 궁성 인근 시장 | 글로벌 공급망, 스마트 물류 허브 |
[이미지: 고구려 도성의 기능 분리 원리와 현대 스마트 시티 회복탄력성 개념 비교]
📚 더 깊이 알아보기
- 환도산성 팔각형 건물지 – 용도 불명의 독특한 구조로 여전히 학계 연구 대상
- 온달 열전 속 ‘시장(市)’ 기록 – 신분을 넘나든 왕도 상업 공간의 생생한 사례
- 안학궁 축조 시기 논쟁 – 고려 왕궁 재해석설과 그 파장 (2020년대 최신 연구)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고구려는 도시를 옮길 때마다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설계했다. 완성된 시스템에 안주하지 않고, 시대가 요구하는 형태로 왕도 자체를 개조하는 결단력이야말로 705년을 버틴 힘이었다.
“흙으로 쌓은 안학궁의 성벽은 무너졌어도, 위기와 일상을 함께 설계했던 그 지혜는 오늘의 도시 아래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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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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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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