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가 무너져도, 그 나라를 품었던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700년 사직을 이어온 고구려가 무너졌다. 당은 옛 고구려 영토와 유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지배층 상당수를 요서 지역의 영주(營州)로 강제 이주시켰다. 나라를 잃은 백성에게 남은 것은 굴욕과 침묵뿐인 듯했다.
그러나 멸망으로부터 정확히 30년이 흐른 698년, 그 유민들 속에서 새로운 나라가 일어섰다.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라 부른 이 나라의 이름은 발해(渤海). 망국의 백성이 어떻게 새 왕조를 세우고, 그 왕조는 왜 굳이 ‘고려’라는 이름을 다시 꺼내 들었을까.
◆ 시대의 풍경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은 당의 감시 속에 30년 가까이 숨죽여 지냈다. 그러다 696년, 거란족 수령 이진충이 당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요서 일대가 혼란에 빠졌다. 고구려 장수 출신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당은 곧바로 추격군을 보냈지만 대조영은 천문령(天門嶺) 전투에서 이를 격파하고 옛 고구려 땅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 지린성 둔화시 일대, 동모산(東牟山)에 이르러 698년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진국(振國)’이다.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면서 국호는 ‘발해’로 굳어졌다.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은 성이 대씨이니,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발해라 하였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698년 무렵 당은 여성 황제 측천무후(무주)가 다스리고 있었다. 요서의 거란 반란으로 국경 통제력이 흔들린 틈이 발해 건국을 가능케 했다.
🗿 유럽/중동
같은 698년, 우마이야 왕조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를 함락시켜 비잔티움 세력을 몰아냈다. 비잔티움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폐위된 뒤 혼란기였다.
🌏 신라·일본
한반도 남쪽에서는 통일신라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일본은 8세기부터 발해와 활발히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려’라는 발해의 옛 이름을 그대로 받아 불렀다.
[이미지: 대조영의 탈출과 동모산 건국 경로 모식도 (696~698년)]
⚔️ 그날의 현장
“천문령의 산길, 당군의 깃발이 흙먼지 속에서 흔들린다. 대조영은 말고삐를 당기며 뒤를 돌아본다. 자신을 따라나선 유민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무너지면 우리는 다시는 나라를 갖지 못한다.’ 그는 말갈 병사들과 고구려 유민 병사들을 한 진영에 세우고 협곡의 지형을 이용해 추격군을 막아섰다. 승리 뒤, 행렬은 다시 동쪽으로 향했다 — 이번엔 도망이 아니라 새 나라를 향한 행군이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발해가 스스로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여겼다는 사실은 추측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아 있다. 759년 무렵 발해 문왕(대흠무)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했고, 일본 측 기록도 발해 사신을 맞이하는 임시 관직을 ‘송고려객사(送高麗客使)’라 불렀다. 발해가 당당히 옛 나라의 이름을 다시 꺼내 든 것은, 그것이 곧 정통성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증거도 이 계승 관계를 뒷받침한다. 발해 문왕의 넷째 딸 정혜공주의 무덤은 돌방무덤에 모줄임천장을 얹은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온돌 유적, 기와의 문양, 불교 미술 양식에서도 고구려의 흔적이 뚜렷하게 이어진다. 다만 지배층 다수를 이루던 말갈족의 문화·언어적 요소도 함께 섞여 있어, 발해는 고구려의 순수한 재현이 아니라 고구려적 정체성 위에 새로운 다민족 국가를 세운 것에 가깝다.
정치적으로도 발해는 당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이되 명칭과 운영 방식을 독자적으로 바꾸었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만큼 번성했다. 이는 옛 고구려의 자주적 기상과, 당·신라·일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던 현실적 감각이 함께 작동한 결과였다.
시대
698년~926년
핵심 인물
대조영(고왕), 문왕 대흠무
핵심 사건
동모산 건국, ‘고려’ 국호 사용
영향
남북국시대, 해동성국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한국 학계)
대조영은 고구려 장수 출신이며 발해 지배층의 핵심은 고구려 유민으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우리 민족사의 나라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부르는 근거이기도 하다.
대안적 견해(중국 학계 등)
대조영과 지배층 다수를 말갈족(속말말갈)으로 보고, 발해를 당 왕조에 예속된 지방 민족정권으로 해석한다. 동북공정 논쟁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나라를 잃은 지 30년, 강제 이주지에서 감시받던 유민들이 다시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은 ‘재건’이 결코 기적이 아니라 준비된 선택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대조영은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이름 — 고구려라는 정체성 — 을 놓지 않았고, 그것이 새 나라의 정당성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 위기를 겪은 조직이나 공동체가 재기할 때도 다르지 않다. 무엇을 잃었는지보다, 무엇을 끝까지 놓지 않았는지가 재건의 방향을 결정한다. 발해가 ‘고려’라는 이름을 다시 꺼내 든 것은 향수가 아니라 전략이었다 — 우리는 어떤 이름, 어떤 정체성을 위기 속에서도 놓지 않고 있는가.
| 구분 | 발해 건국기 | 현재 |
|---|---|---|
| 정치/안보 | 망국 유민이 강대국(당)의 혼란기를 틈타 독립을 이룸 | 주변 강국 사이 균형외교로 생존·발전을 모색하는 중소국가 전략 |
| 군사/외교 | 당·신라·일본·돌궐 사이 실리 외교, 독자 연호 사용 | 미·중·일·러 사이 한국의 다자외교 전략 |
| 문화/정신 | 고구려 계승 정체성으로 다민족을 통합한 ‘해동성국’ | 전통과 정체성을 자산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K-컬처 |
[이미지: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계승의 상징도]
📚 더 깊이 알아보기
- 중국 지린성 룽터우산에서 발굴된 정혜·정효공주 무덤의 고구려식·당식 혼합 양식
-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저술한 《발해고》 —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한 책
- 상경용천부(현 헤이룽장성 닝안시) 도성 유적과 발해 온돌 유구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나라는 무너져도 사람들이 지켜낸 이름은 무너지지 않는다. 발해는 그 이름 위에 다시 세운 나라였다.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했지만, 고구려의 정신은 698년 동모산에서 다시 깃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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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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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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