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 하나가 나라 하나의 역사를 증언할 수 있을까. 높이 6.39미터, 무게 37톤에 이르는 이 응회암 돌기둥은 그럴 수 있다고 답한다.
414년,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려 세운 이 비석은 이후 1400년 넘게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의 수풀 속에 묻혀 있었다. 청나라가 자신들의 발상지라며 이 일대를 봉금(封禁) 지역으로 묶어 사람의 출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1876년 봉금이 풀리면서 비석은 서서히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가 탁본을 입수해 본국으로 가져가면서 비로소 동아시아 학계 전체를 뒤흔드는 사료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 비석은 발견되자마자 평온하지 못했다. 비문 속 단 몇 글자를 둘러싸고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 학자들이 100년 넘게 논쟁을 벌였고, 급기야 “일본군이 글자를 조작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왜 겨우 돌에 새긴 1,775자가 이토록 뜨거운 외교 문제가 되었을까.
◆ 시대의 풍경
391년, 열여덟 살의 담덕(談德)이 고구려 19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광개토왕이다. 즉위 이듬해부터 그는 백제를 압박해 한강 이북을 빼앗고, 북으로는 거란과 후연을 격파해 요동 반도를 완전히 장악했으며, 남으로는 가야·왜의 연합 세력이 신라를 침공하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이를 격퇴했다. 재위 22년 만인 412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고구려의 영토는 만주와 한반도 중북부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아들 장수왕은 즉위 3년째인 414년, 아버지의 업적을 돌에 새겨 후세에 남기기로 한다. 이렇게 세워진 것이 광개토왕릉비다. 4면에 걸쳐 예서체로 새겨진 1,775자 가운데 약 150자는 오랜 세월 마모되어 지금도 판독이 불가능하다. 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고구려 건국 신화, 광개토왕의 정복 전쟁 기록, 그리고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의 명단과 규정이다.
“왕의 은택이 하늘에 미치고 위무(威武)가 사해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생업을 편안히 하고 나라가 부강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화북과 강남이 갈라진 남북조 시대 초입. 후연·북위가 요동을 두고 고구려와 각축했다.
🗿 유럽/중동
서고트족 알라리크가 410년 로마를 약탈했고, 광개토왕이 죽은 412년 서로마 제국은 이미 붕괴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 기타 지역
일본 열도는 아직 통일 왕권 이전 단계로 비문에 ‘왜(倭)’라는 이름으로만 등장하며, 인도는 굽타 왕조의 전성기였다.
[이미지: 광개토왕릉비 4면 구성과 비문 판독 개요]
⚔️ 그날의 현장
“1880년 무렵, 압록강을 낀 지안 벌판. 청나라의 봉금이 풀리자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려 잡초를 걷어내는데, 낫끝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걸린다. 흙과 이끼를 걷어내자 사람 키의 네 배가 넘는 거대한 돌기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1883년, 일본 육군 밀정 사코 가게아키가 지도를 그리는 척 이 지역을 정탐하다 비석의 소문을 듣는다. 그는 현지인을 시켜 종이를 대고 먹을 두드려 탁본을 뜨게 한 뒤, 이를 몰래 도쿄로 실어 나른다. 참모본부의 등불 아래서 펼쳐진 탁본 한 장이, 이후 100년 넘게 이어질 동아시아 사료 전쟁의 첫 장을 연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비문 가운데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부른 것은 이른바 ‘신묘년조(辛卯年條)’다.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구절인데, 일본은 이를 근거로 4세기 후반 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왔다. 이는 20세기 초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도 활용됐다.
1972년, 재일사학자 이진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자국에 유리하도록 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 형태를 변조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사코가 가져온 탁본과 실제 비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이 주장은 냉전기 한일 양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후 진행된 한·중·일 3국의 초기 탁본 비교 연구, 그리고 비석 인근 주민에 대한 중국 학계의 현지 조사에서는 조직적 변조의 뚜렷한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탁본을 더 선명하게 뜨기 위해 비면에 석회를 바르는 관행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로 확인됐다 — 이는 위조가 아니라 탁본업자들의 상업적 관행에 가까웠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다수 견해다. 신묘년조 해석 논쟁 자체는 별개로, 지금도 판독안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진행 중이다.
건립
414년 (장수왕 3년)
재발견
1876년 봉금해제 후~1883년 탁본유출
글자 수
1,775자 (판독불능 약 150자)
현 위치
중국 지린성 지안시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조직적 석회 변조설은 근거가 박약하며, 신묘년조는 왜의 실제 지배가 아니라 광개토왕의 업적을 극적으로 서술하기 위한 고구려 중심의 과장 수사로 본다.
대안적 견해
일부 학자는 이진희의 초기 문제제기가 사료 비판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재평가하며, 판독 불능 글자에 대한 새로운 3D 스캔 기반 재판독 작업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본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광개토왕릉비 논쟁이 지금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명확하다. 돌에 새긴 사실조차 권력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역사를 판단해야 하는가. 이는 100년 전 탁본 한 장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역사 왜곡·역사전쟁의 원형이다.
실제로 다음 화에서 다룰 중국의 ‘동북공정’은 같은 비석, 같은 지안 유적을 두고 고구려사를 중국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원본 사료를 지키고, 다양한 해석을 투명하게 검증하는 일이 왜 국가 차원의 과제인지, 광개토왕릉비는 1500년이 지난 지금도 몸소 증언하고 있다.
| 구분 | 고구려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후연·거란·백제·신라·가야·왜가 얽힌 다자 각축, 정복으로 판도 확정 | 동북아 4대 강국 사이, 사료·해석 주도권을 둔 역사전쟁 |
| 군사/외교 | 기병 중심 정복전, 신라 구원 등 동맹 개입 | 군사 동맹 대신 정보·서사 주도권 경쟁 |
| 문화/정신 | 비석에 스스로의 업적을 새겨 영속화하려 한 상무·기록 정신 | 원본 사료·문화유산을 지켜내려는 학술적 주권 의식 |
[이미지: 사코 탁본에서 현대 디지털 복원까지, 광개토왕릉비 연구의 여정]
📚 더 깊이 알아보기
- 현존 최고(最古)의 원석(原石) 탁본은 사코 이전인 1876~1880년대 초기본으로, 중국·일본 도서관에 여러 판본이 흩어져 있어 상호 대조 연구가 진행 중이다.
- 비석과 함께 지안 일대의 태왕릉, 장군총(광개토왕 또는 장수왕의 능으로 추정) 등이 2004년 ‘고구려 고분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함께 등재됐다.
- 최근에는 고해상도 3D 스캔과 다중분광 촬영으로 육안으로 안 보이던 마모 글자를 재판독하려는 국제 공동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비석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읽는 사람의 눈과, 그 사회의 힘의 논리가 비석의 침묵을 대신 채운다. 그러기에 원본을 지키고, 여러 해석을 투명하게 다투는 일 자체가 역사를 지키는 일이다.
“1,775자 중 150자가 지워져도, 광개토왕이 남긴 정신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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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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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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