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반, 강화 선원면의 고추밭에는 벌써 허리를 굽힌 분들이 몇 보였습니다. 저는 그날 이웃집 할머니를 따라 밭에 나가 보았습니다. 할머니는 해가 산 위로 올라올 때까지 한 번도 허리를 펴지 않으시다가, 장갑을 벗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밭은 여기까지, 이제 집에 가서 밥해야지.” 저는 그 말이 하루 일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두 번째 일이 시작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날에야 알았습니다.
![]() [코리안투데이] 새벽 고추밭에서 일하는 강화 할머니 © 장형임 칼럼니스트 |
강화의 여성들은 하루를 참 잘게 나누어 씁니다. 새벽에는 밭, 아침에는 부엌, 낮에는 어르신 약 챙기기와 읍내 병원 나들이, 저녁에는 다시 부엌과 장부 정리가 기다립니다. 어느 하나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기에 늘 무언가를 하다 말고 다음 일로 옮겨 가야 합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손에 쥐어지지 않을 만큼 잘게 흩어져 있는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제가 요즘 마을에서 이야기하는 인공지능은 거창한 기계가 아닙니다. 전화기 안에 들어 있는, 말로 시키면 말로 대답하는 작은 도우미에 가깝습니다. 밭에서 흙 묻은 손으로 “내일 아침에 비료 주문하라고 알려 줘” 하고 말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글자를 찾아 누르지 않아도 되고, 잊어버릴까 봐 마음 한쪽을 붙들어 두지 않아도 됩니다.
온수리에서 민박을 하시는 아주머니는 밤늦게 오는 예약 문자가 늘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손님은 밤 열한 시에 묻는데 나는 새벽에 밭 나가야 하니까 자야지요.” 그래서 저는 자주 받는 질문 몇 가지를 미리 적어 두고, 인공지능이 대신 첫 답장을 보내도록 함께 만들어 드렸습니다. 며칠 뒤 아주머니는 “이제 자면서도 장사를 한다”며 웃으셨습니다. 그 웃음 속에 되찾은 잠 한 시간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집에서는 저녁마다 식탁에 영수증을 펼쳐 놓고 장부를 쓰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영수증을 사진으로 찍어 두면 날짜와 금액이 알아서 정리됩니다. 한 시간 걸리던 일이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에 끝나니, 그 집 어머니는 처음으로 저녁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가 어떤 큰 성과보다 반가웠습니다.
다만 저는 기술이 돌려준 시간을 또다시 일로 채우게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시간을 아꼈으니 밭을 한 고랑 더 매자고 하면, 돌려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 됩니다. 며칠 전 할머니가 오후 볕 드는 마루에 그냥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잠깐이야말로 제가 바라던 풍경이었습니다.
물론 배우는 길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글자는 작고, 기계의 말투는 낯설고, 한 번 잘못 누르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설명서보다 옆에 앉아 함께 눌러 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그 옆자리에 앉는 일을 제 몫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 번 손에 익으면, 그다음부터는 그분들이 저보다 훨씬 야무지게 쓰십니다.
여러분의 하루에도 잘게 흩어진 시간이 있으신가요. 그 조각들을 조금만 모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으신가요. 밭일과 살림 사이에서 하루를 쪼개 쓰는 분이라면, 더욱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도 새벽 밭에서 돌아오는 분들이 부엌으로 곧장 가지 않고, 마루에 잠깐 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술이 할 일은 그 잠깐을 지켜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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