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미희 칼럼니스트

돌봄의 하루는 왜 기억에 남지 않을까
돌봄의 하루는 하나의 큰 사건이 아니라 수십 개의 작은 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약 챙기기, 식사 도와드리기, 화장실 모시기, 병원 예약 확인, 갑작스러운 기분 변화 다독이기. 하나하나는 작지만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정리할 틈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많이 했다’는 피로만 남고, ‘무엇을 했는지’는 손에서 흘러내리듯 사라집니다.
기억에 남지 않는 하루가 쌓이면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분명 애를 썼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그 허전함이 자책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나’, ‘오늘 어머니가 왜 저러셨지’ 하는 생각이 밤에 찾아오면 잠도 얕아집니다. 돌보는 사람이 지치는 이유 중 하나는 몸의 고단함보다 이렇게 하루가 증발해 버리는 허무함일지도 모릅니다.
기록은 그 증발을 막는 가장 소박한 방법입니다. 거창한 일기가 아니어도 됩니다. ‘오전에 죽 반 그릇, 오후에 산책 10분, 저녁에 기분이 가라앉으심’처럼 사실만 몇 줄 적어 두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종이에 옮겨진 순간 하루는 더 이상 흐릿한 덩어리가 아니라, 내가 해낸 일들의 목록이 됩니다.
몇 줄의 기록이 알려 주는 것들
기록이 며칠만 쌓여도 눈에 보이지 않던 흐름이 드러납니다. 저는 아버지가 유독 예민해지시는 날이 있어 늘 제 탓인가 싶었는데, 노트를 넘겨 보니 그런 날은 대개 전날 밤에 잠을 설치신 날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서는 짜증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대신 낮잠을 조금 더 챙겨 드리는 쪽으로 마음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기록은 이렇게 감정과 사실을 분리해 줍니다.
병원에 갈 때도 기록의 힘은 큽니다. 진료실에서 ‘요즘 어떠세요?’ 하고 물으면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냥 비슷해요’라고 대답하고 나오기 일쑤지요. 그런데 노트에 ‘식사량이 줄기 시작한 날’, ‘밤에 몇 번 깨셨는지’, ‘새로 나타난 증상’이 적혀 있으면 짧은 진료 시간 안에 필요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돌보는 사람의 관찰이 의료진에게 가장 귀한 자료가 되는 순간입니다.
형제자매나 다른 가족과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많이 힘들다’는 말은 잘 전해지지 않지만, ‘이번 주에 밤에 깨신 날이 닷새’라는 기록은 다르게 다가옵니다. 기록은 내 수고를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돌보는 사람들이 같은 그림을 보게 하는 공통의 언어가 되어 줍니다.
무엇을, 어떻게 적으면 좋을까
처음부터 완벽한 양식을 갖추려 하면 사흘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저는 세 가지만 적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첫째, 드신 것과 드신 양. 둘째, 잠과 기분. 셋째, 오늘 특별했던 일 한 가지. 이 세 줄이면 충분하고, 여유가 있는 날에만 한두 줄을 더 보태면 됩니다. 노트는 손에 닿는 곳, 이를테면 약 상자 옆이나 식탁 한쪽에 두어야 잊지 않고 쓰게 됩니다.
적을 때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판단보다 사실을 먼저 쓰는 것입니다. ‘오늘 어머니가 고집을 부리셨다’ 대신 ‘오후 3시, 목욕을 권하자 싫다고 하심. 30분 뒤 다시 권하니 응하심’이라고 적어 보세요. 같은 장면인데 두 번째 문장은 다음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힌트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아주 작게라도 내 마음 한 줄을 덧붙이면 좋습니다. ‘나도 오늘 많이 지쳤다’ 같은 솔직한 한 줄이 그날의 나를 기억해 줍니다.
글씨가 잘 안 써지는 날이나 눈이 피로한 날에는 달력에 동그라미나 세모 같은 기호만 그려도 됩니다. 잘 드신 날은 동그라미, 힘들었던 날은 세모, 병원 다녀온 날은 별표. 한 달이 지나 달력을 멀리서 바라보면 기호만으로도 흐름이 보입니다. 기록은 문장의 길이가 아니라 이어지는 꾸준함에서 힘이 나옵니다.
돌보는 나를 위한 기록으로 넓혀 가기
돌봄 일지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부모님 이야기만이 아니라 내 이야기가 함께 적히기 시작합니다. 저는 어느 날 노트 한 귀퉁이에 ‘오늘 라벤더 향을 손수건에 묻히고 잠깐 창가에 앉았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 한 줄이 있어서, 그 주에 내가 나를 챙긴 순간이 하나라도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돌보는 사람의 하루에서 자기 자신은 가장 먼저 지워지기 쉬운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일지 맨 아래에 ‘오늘 나에게 해 준 것’ 한 칸을 두기를 권합니다. 따뜻한 물 한 잔을 천천히 마신 것, 잠깐 밖에 나가 바람을 쐰 것, 좋아하는 향을 맡으며 숨을 고른 것. 그 칸이 며칠 연속 비어 있으면 그것 자체가 신호입니다. 나를 돌보는 일을 미루고 있다는 신호이고, 그 신호를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다음 날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록이 쌓이면 그것은 돌봄의 역사이자 나의 역사가 됩니다. 언젠가 돌봄이 끝난 뒤에 노트를 다시 펼치면, 힘들었던 기억만이 아니라 ‘그날 아버지가 오랜만에 웃으셨다’, ‘어머니가 내 손을 오래 잡으셨다’ 같은 문장이 함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하루를 넘기기 위해 적는 몇 줄이지만, 그 몇 줄이 훗날 나를 위로하는 가장 정직한 기록이 되어 줍니다.
오늘의 마음돌봄 실천
★☆☆오늘 밤 잠들기 전, 종이 한 장이나 달력 여백에 딱 세 줄만 적어 보세요. ① 오늘 부모님이 드신 것 ② 잠과 기분이 어떠셨는지 ③ 오늘 있었던 일 한 가지. 잘 쓰려고 하지 말고 사실만 적습니다. 흐릿하던 하루가 ‘내가 해낸 일’로 바뀌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수 있어요.
★★☆노트를 한 권 정해 약 상자 옆이나 식탁 위처럼 늘 눈에 띄는 자리에 펜과 함께 두세요. 매일 같은 시간, 예를 들어 저녁 약을 드린 직후에 펼쳐 세 줄을 적고, 맨 아래에 ‘오늘 나에게 해 준 것’ 한 줄을 덧붙입니다. 자리와 시간을 정해 두면 잊지 않고 이어 가기 쉽고, 나를 챙기는 습관도 함께 자랍니다.
★★★일주일이 지난 주말,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노트를 처음부터 천천히 넘겨 보세요. 잘 드신 날과 힘드셨던 날에 각각 동그라미와 세모를 그려 보고, 반복되는 흐름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다음 병원 방문 때 메모로 가져가거나 가족과 나눠 보세요. 기록을 되돌아보는 시간은 돌봄의 방향을 잡아 주고, 스스로를 애쓴 사람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 줍니다.
기록은 부모님의 상태를 진단하거나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루를 정리하고 필요한 이야기를 정확히 전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건강에 걱정되는 변화가 보인다면 기록을 들고 의료진과 상의해 주세요. 그리고 쓰지 못한 날이 있어도 스스로를 나무라지 마세요. 다시 펼치는 날이 곧 이어 쓰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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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로마테라피스트·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병원동행매니저 자격을 가진 김미희 칼럼니스트는 부모님을 직접 돌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돌봄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글을 씁니다. 코리안투데이 인천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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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미희 기자: incheonsouth@thekoreantoda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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