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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 명작선-14] 아궁이 앞에 서린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

임혜경 시인의 「은밀한 공간」

기사입력 기사번호 58550

사진 속에는 아궁이 앞에 웅크려 앉은 한 여인이 보입니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등을 둥글게 말고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곁에는 솥이 놓여 있고 땔감도 보입니다. 은회색의 거친 화면은 빛바랜 옛 사진처럼, 오래전 어느 집 부엌의 풍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코리안투데이] 임혜경 시인의 「은밀한 공간」  © 장시백 기자

“자식 역성들다

남편 역정 집 나가라”

시는 집안에서 벌어진 한바탕 소란을 단 두 줄로 보여 줍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편을 들었다가 남편의 역정을 삽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누가 옳고 그른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집 나가라”는 거친 말 한마디만 남겨 놓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장면이 아궁이 앞입니다. 속이 상했다고 집안일을 놓아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는 다시 불 앞에 앉아 솥을 끓입니다. 바로 그때 시인의 눈에 평범한 부엌 풍경이 다르게 들어옵니다.

“끓어오르는 수증기는 울 엄니 한숨

끓어내리는 물방울은 울 엄니 눈물”

위로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어머니의 한숨이 되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어머니의 눈물이 됩니다. 특히 ‘오르는’ 수증기와 ‘내리는’ 물방울의 방향이 인상적입니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은 한숨이 되고, 끝내 흘러내리는 것은 눈물이 됩니다. 시인은 설명하지 않고도 물의 움직임만으로 어머니 마음의 흐름을 보여 줍니다.

말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솥이 대신 끓고, 김이 대신 올라가고, 물방울이 대신 흘러내립니다. 그래서 제목 「은밀한 공간」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아궁이가 있는 부엌은 가족의 끼니를 마련하는 생활의 공간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남에게 쉽게 보여 주지 못하는 마음을 혼자 삭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지피는 동안, 어머니 대신 솥이 끓고 김이 오릅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수증기는 단순한 김이 아닙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은 차마 보이지 못한 눈물처럼 다가옵니다. 어머니는 울지 않는데 부엌이 대신 울고 있는 듯합니다.

‘울 엄니’라는 표현도 이 시의 정서를 깊게 만듭니다. ‘우리 어머니’라고 했을 때보다 훨씬 가깝고 살가운 느낌이 납니다. 오래전부터 입에 익은 말처럼 정겹기도 합니다. ‘울 엄니’라는 말에서 시인이 어머니를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울 엄니 한숨”, “울 엄니 눈물”을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도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 작품이 마음을 건드리는 까닭은 어머니의 희생이나 사랑을 직접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식 편을 들었던 어머니가 있고, 남편의 역정이 있고, 아궁이 앞에서 다시 불을 지피는 굽은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수증기가 올라가고 물방울이 흘러내립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살다 보면 속이 상해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져도 밥은 지어야 하고, 식구들은 먹여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뒤로 미뤄 둔 채 살아온 어머니들이 있었습니다.

임혜경 시인은 그 긴 세월을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궁이 앞에 앉은 어머니와 끓는 솥 하나를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솥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수증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삼킨 한숨이 올라가고 있고, 그 아래로 차마 보이지 못했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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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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