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후, 전등사로 올라가는 길목의 작은 가게 앞에서 저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순무김치와 속노랑 고구마를 좌판에 내놓은 가게였는데, 마침 외국인 관광객 두 사람이 순무 하나를 손에 들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순무를 반으로 자르는 시늉을 하고, 입에 넣어 씹는 흉내를 내다가, 결국 제 쪽을 돌아보며 웃으셨습니다. “아유, 이걸 무라고 해야 하나, 배추라고 해야 하나. 말이 안 통하니 이렇게 답답할 수가 없어.” 그 한마디가 제게는 오래 남았습니다.
![]() [코리안투데이] 전등사 길목 순무 좌판과 휴대폰 © 장형임 칼럼니스트 |
그날 아주머니는 순무를 팔지 못하셨습니다. 손짓만으로는 순무가 어떤 맛인지, 김치로 담그면 어떻게 되는지, 왜 강화에서 나는 것이 특별한지를 전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관광객들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고, 아주머니는 좌판을 다시 정리하며 혼잣말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외국 손님이 부쩍 오는데, 나는 인사밖에 못 하니 원.” 저는 그 말을 들으며 제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며칠 뒤 저는 다시 그 가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번역 앱을 열어 보여드렸습니다. 마이크를 누르고 우리말로 말하면 화면에 영어 문장이 뜨고, 상대가 영어로 말하면 우리말로 바뀌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손사래부터 치셨습니다. “나는 이런 거 못 해. 글씨도 작고, 눌러야 할 것도 많고.” 저는 딱 한 번만 해보시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아주머니가 마이크를 누르고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강화 순무예요. 조금 맵고, 뒤끝은 달아요.” 잠시 뒤 화면에 영어 문장이 나타났고, 휴대폰이 낯선 목소리로 그것을 읽어 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화면과 저를 번갈아 보시더니 “이게 다 된 거야? 내가 한 말이 저기 들어간 거야?”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렇다고만 답했는데, 아주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화면을 들여다보셨습니다.
그다음 주에 들렀을 때 아주머니의 앞치마 주머니에는 휴대폰이 들어 있었습니다. 마침 외국인 손님 한 분이 좌판 앞에 서자, 아주머니는 망설임 없이 휴대폰을 꺼내 마이크를 누르셨습니다. “이건 강화에서만 나는 순무예요. 김치로 담가 먹어요.” 손님이 화면을 보고 웃더니 무어라 대답했고, 이번에는 우리말이 떴습니다. 아주머니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시고는 저를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순무가 맛있어 보인다네.” 그날 순무 두 봉지가 팔렸습니다.
물론 번역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강화 억양이 섞인 말을 기계가 엉뚱하게 알아듣는 날도 있었고, 아주머니가 급하게 말하면 문장이 중간에 끊기기도 했습니다. “기계가 내 말을 자꾸 딴소리로 알아들어.”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웃으셨지만, 예전처럼 답답해하는 웃음은 아니었습니다. 말이 오가니 사람이 오갔고, 손짓만 하던 자리에 눈맞춤과 웃음이 들어섰습니다. 저는 순무가 팔린 것보다 그 변화가 더 크게 보였습니다.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분들이 강화에는 많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것이 도시의 큰 회사나 젊은 사람들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간 휴대폰 하나가 제게 인공지능이 무엇인지를 가장 쉽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던 말 한마디를 건네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섬에서 온 인공지능은 그렇게 작은 좌판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만 하다가 돌아선 순간이 있으셨는지요. 혹은 반대로, 무언가를 묻고 싶었지만 상대가 알아듣지 못할까 봐 입을 다문 적은 없으셨는지요. 그때 곁에 작은 도구 하나가 있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 한번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번 주말에도 그 가게에 들를 생각입니다. 아주머니가 번역기에 또 어떤 말을 담으셨는지 듣고 싶고, 이번에는 고구마 이야기까지 이어지는지 보고 싶습니다. 이 연재는 그렇게 강화의 가게와 골목에서 만난 이야기로 채워 가려 합니다. 다음 장에서 또 다른 장면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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