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8년, 한 신생 왕조가 이미 250년 전에 멸망한 나라의 이름을 다시 꺼내 들었다. 왜 하필 ‘고려’였을까.
668년 평양성이 무너진 뒤 고구려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250년 뒤, 송악(개성)의 호족 왕건은 나라를 세우면서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선택했다. 신라도, 후백제도 아닌 이미 사라진 왕조의 이름을 부활시킨 것이다.
국호란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그 나라가 스스로를 어떤 역사의 계승자로 규정하는가에 대한 선언이다. 왕건은 왜 굳이 ‘고려’를 택했으며, 그 선택은 이후 고려의 대외정책과 영토관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 시대의 풍경
9세기 말 신라는 극도로 쇠약해졌고, 각지에서 호족이 할거하는 후삼국시대가 열렸다.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워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으나, 지나친 폭정으로 신망을 잃었다. 918년,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이 신숭겸·복지겸·홍유 등의 추대를 받아 정변을 일으켜 새 나라를 세웠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했다. 이는 궁예가 이미 내세웠던 고구려 계승 명분을 그대로 이어받되, 폭정과 결별해 정통성을 새로 세우려는 선택이었다. 이후 왕건은 918년부터 신라의 항복(935년)과 후백제 병합(936년)을 거쳐 후삼국을 통일했고, 옛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북진정책을 국가 노선으로 삼았다.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만대 왕업을 누릴 땅이다. 마땅히 사중(四仲)마다 그곳에 순주(巡駐)하여 백 일을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게 하라.”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907년 당이 멸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기가 이어지던 무렵. 거란(요)이 916년 건국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며 동북아 최강자로 부상했다.
🗿 유럽
비잔틴 제국은 마케도니아 왕조 전성기를 구가했고, 서유럽에서는 936년 오토 1세가 동프랑크 왕위에 올라 훗날 962년 신성로마제국을 세워 ‘옛 로마’의 이름을 다시 꺼내 들었다.
🌏 일본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의 섭관정치가 절정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이미지: 후삼국 통일과 발해 유민 남하, 서경(평양) 중심의 북진정책 구도(918~943년)]
⚔️ 그날의 현장
“934년 어느 겨울, 압록강을 건너온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은 수만 명의 유민을 이끌고 눈길을 걸어 고려 도성에 이르렀다. 등에 짊어진 짐 속에는 발해 왕실의 흔적이 담긴 몇 안 되는 유물뿐이었다.”
“왕건은 그를 친히 맞이해 왕씨 성과 ‘계(繼)’라는 이름을 내리고 왕실 족보에 올렸다. 그것은 단순한 망명객 수용이 아니라, 고구려의 옛 후예인 발해의 정통성마저 고려가 흡수한다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5세기 장수왕 대에 고구려는 스스로 국호를 ‘고려’로 줄여 부른 정황이 사서 곳곳에서 확인된다. 즉 왕건은 완전히 새로운 이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전성기에 스스로 사용했던 이름을 그대로 되살린 셈이다. 통일신라 말의 혼란 속에서 국론을 하나로 모을 상징이 필요했던 왕건에게, 옛 대제국의 이름은 더없이 강력한 정치적 자산이었다.
이 계승 의식은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왕건은 황폐해진 평양을 재건해 ‘서경’으로 삼고 황해도 백성을 옮겨 살게 했으며,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직접 순행해 국경을 살폈다. 그 결과 고려의 북쪽 경계는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선까지 확장되었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왕족과 유민 수만 명이 고려로 남하했고, 왕건은 이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942년에는 거란이 보낸 사신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이는 ‘만부교 사건’을 일으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화친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국호, 천도할 뻔했던 서경 중시, 발해 유민 포용, 거란에 대한 적대까지 — 이 모든 정책은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하나의 서사로 꿰어져 있었다. 이는 왕건 개인의 신념이자, 신생 왕조가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정교한 국가 전략이었다.
시대
10세기 초(918~943)
핵심 인물
태조 왕건, 발해 태자 대광현
핵심 사건
고려 건국(918)·발해 유민 흡수(926~934)
영향
북진정책·거란과의 장기 대립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왕건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후삼국 통합을 위한 정치적 정당화 장치였으며, 서경 중시·발해 유민 포용 등 실제 정책으로 뒷받침된 진지한 국가 이념이었다는 견해가 통설이다.
대안적 견해
일각에서는 왕건 가문이 예성강 유역 해상 호족 출신으로 고구려 왕실과 직접적 혈연 관계를 입증할 근거가 없으며, ‘고려’는 상징적 명분 차용에 가깝다는 비판적 해석도 제기된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국가나 조직이 자신의 뿌리를 어떤 역사와 연결 짓느냐는 지금도 강력한 정체성 전략이다. 왕건이 ‘고려’라는 이름으로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묶었듯, 오늘날 기업과 국가 브랜드 역시 전통과 역사적 상징을 통해 신뢰와 소속감을 만들어낸다.
‘고려(Korea)’라는 이름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리는 국호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천 년 전 한 신생 왕조의 상징 전략이 얼마나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 구분 | 고려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거란·여진과 대치, 서경 중심 국경 방어 | 주변 강대국 사이 균형외교 |
| 군사/외교 |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단교 | 가치·원칙 기반 대외정책 |
| 문화/정신 | 고구려 계승의식으로 통합된 국가 정체성 | 역사·전통에 기반한 국가 브랜딩 |
[이미지: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국호와 정체성의 계승 흐름도]
📚 더 깊이 알아보기
- 평양(서경)에는 고려 태조가 여러 차례 순행하며 정비한 성곽·궁궐 터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조사되고 있다.
- 발해 태자 대광현이 하사받은 ‘왕계’라는 이름은 고려 왕실 족보에 남아, 발해 왕족의 후예가 고려 지배층 일부로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 훈요십조 원문은 《고려사》 태조 세가에 전하며, 서경 중시·거란 경계 등 왕건의 대외 인식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1차 사료다.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이름을 잇는다는 것은 곧 그 이름이 품은 기억과 책임을 함께 짊어지겠다는 선언이다. 왕건이 되살린 ‘고려’라는 이름은 오늘날 ‘코리아(Korea)’로 세계에 남아, 고구려의 기상이 결코 668년에 멈추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름을 바꾸어 다시 일어섰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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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고구려 편 (총 4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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