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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3권 · 제16장 · 경로당 문 앞에서 만난 어른, 효의 재정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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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 브릿지 · 제3권 제16장 (hero)

지난겨울, 서울 변두리의 한 경로당 앞에서 저는 한 시간 넘게 문을 열지 못하고 서성이는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습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은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고 계셨습니다. “예전 같으면 내가 회장이었는데,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와서 다 정하더라고.” 그 한마디가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제 책 「실버 브릿지: 돈과 관계」 제16장을 쓰면서 저는 계속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유교 문화권에서 노인은 왜 ‘어른’에서 ‘짐’으로, ‘권위’에서 ‘주변’으로 밀려났는가. 챕터에 적었듯이 “한때 가문의 중심이었던 노인들이 사회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는 문장은 제 취재 수첩에서 가장 자주 밑줄이 그어진 대목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망설임은 통계표 어딘가의 숫자가 아니라, 제 눈앞에서 벌어진 구체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숫자는 그 장면을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2024년 통계청 고령자통계에 따르면 19세 이상 성인의 10.8%가 인권침해나 차별을 가장 많이 받는 집단으로 ‘노인’을 꼽았고, 이는 장애인 다음으로 높은 수치였습니다. 60세 이상 인구의 사회적 고립도는 40.7%로 20대보다 16.2%포인트나 높았습니다. 혼자 사는 고령자 가구는 213만 8천 가구, 그 가운데 18.7%는 도움받을 사람조차 없다고 답했습니다. 무엇보다 저를 오래 붙잡았던 숫자는 66세 이상 노인빈곤율 39.7%, OECD 37개국 중 압도적 1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평균의 거의 3배에 달하는 이 수치 앞에서, 저는 그 할아버지가 왜 경로당 문 앞에서 망설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저는 중국 산둥성의 한 농촌 마을에서도 한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자녀 셋을 모두 도시로 보낸 그분은 마을에서 흔히 ‘빈둥지 노인(空巢老人)’이라 불리는 처지였습니다. 자녀들은 명절마다 전화로 안부를 전하고 매달 얼마간의 돈을 송금했지만, 정작 그분 곁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중국은 2013년 ‘노인권익보장법’을 개정해 자녀가 부모를 자주 방문하도록 법으로 의무화했다고 합니다. 법으로 효도를 강제해야 할 만큼 전통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원거리 효도(远距离孝道)’라 부른다고 하더군요. 직접 곁을 지키는 대신 송금과 전화로 마음을 대신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한국의 경로당 앞 할아버지와 중국의 빈둥지 노인, 두 분의 사정은 언뜻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저에게는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두 가지에 있었습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대가족을 해체시켰고, 그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서 노인은 ‘존경의 대상’에서 ‘돌봄의 부담’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한국의 노인 세대는 1960~70년대 경제 개발의 주역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노후는 준비하지 못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국민연금이 1988년에야 도입되었으니, 그 세대에게 연금 사각지대는 낯설지 않은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쓰면서 우리 사회가 고령화를 인구 통계의 문제로만 다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65세 이상 인구가 1,024만 명을 넘어 전체의 20%를 차지하며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는 발표는 뉴스로 지나갔지만, 그 숫자 하나하나에는 경로당 문 앞에서 망설이던 할아버지 같은 얼굴들이 있습니다. 중국 또한 60세 이상 인구가 3억 1천만 명에 달해, 2035년에는 4억 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4-2-1 가족구조’라는 낯선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조부모 네 명, 부모 두 명을 자녀 한 명이 떠받쳐야 하는 구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그 마을 어르신도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책의 다른 대목에서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효는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가족실태조사를 보면 ‘노부모 부양은 가족의 책임’이라는 응답이 1998년 89.9%에서 2023년 19.6%로 급락했습니다. 사반세기 만에 열에 아홉이던 응답이 다섯에 하나로 줄어든 셈입니다. 중국에서도 국가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을 ‘이상적인 노후’로 꼽은 도시 거주 청년층의 비율이 2000년대 초 60%대에서 최근 20%대까지 떨어졌습니다. 두 나라 모두 ‘함께 사는 효’에서 ‘따로 챙기는 효’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는 내내, 이런 변화를 ‘효심의 상실’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부양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 마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산둥성 어르신의 자녀들이 매달 보내는 송금과, 명절마다 걸려오는 전화 너머의 목소리에도 나름의 진심이 담겨 있었으니까요. 다만 그 진심이 예전처럼 곁을 지키는 형태로 표현되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효’라는 말을, 이 시대에 맞게 다시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독자 여러분은 곁에 계시지 않은 부모님께,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전하고 계신가요.

경로당 앞의 그 할아버지는 결국 그날 문을 열고 들어가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함께 걸어드린 몇 걸음이 전부였지만, 그분은 “같이 가주니 낫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짧은 한마디가 어쩌면 이번 장 전체의 결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돈과 관계」 제16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분들은 위아북 상세 페이지(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3-kr/)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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