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구로동의 한 경로당에서 최 여사님을 만났습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매주 화요일이면 은행에 들러 정기예금 만기를 확인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자가 3%대밖에 안 되는 걸 알지만, 원금이 보장되니까요.” 최 여사님의 그 말씀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집 한 채와 통장 몇 개, 그것이 평생 일군 전 재산인데 정작 당장 병원비로 쓸 현금이 부족해 자녀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처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날 취재 수첩을 덮으며, 이번 장의 주제가 바로 이 어르신의 얼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최 여사님의 이야기는 제3권 「돈과 관계」 제3장에서 다룬 한국 고령자의 전형적인 모습과 겹칩니다. 챕터 본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한국 고령자의 투자 철학은 한 마디로 ‘잃지 않는 것’입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모두 경험한 세대로서, 이들에게 주식이나 펀드는 ‘도박’에 가까운 인식이 뿌리 깊습니다.” 최 여사님도 젊은 시절 이웃이 주식으로 전 재산을 날리는 것을 지켜봤다고 하셨습니다. 그 기억이 평생의 투자 원칙이 된 셈입니다.
숫자로 들여다보면 이 두려움은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닙니다. 2024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993만 8천 명, 전체의 19.2%에 이르렀고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고령가구 자산의 80% 이상이 부동산에 묶여 있고 금융자산은 겨우 16% 남짓입니다. 집은 있지만 쓸 돈이 없는 구조인 셈이지요. 그 결과 66세 이상 은퇴연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은 39.8%로, OECD 평균 13.1%의 세 배에 달합니다. 최 여사님처럼 “원금만은 지키겠다”는 선택이 모여, 역설적으로 가장 가난한 노년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시기 저는 베이징 외곽의 한 사회구역센터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았습니다. 은퇴한 지 3년 된 왕 선생 같은 ‘신노인(新老人)’들이 스마트폰으로 개인양로금 계좌 앱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2023년 중앙금융공작회의에서 “양로금융이라는 큰 글을 잘 써라”는 방침을 내놓았고, 2024년 11월 기준 개인양로금 계좌 개설자는 7,279만 명에 달했습니다. 양로 목표 펀드의 자산배분을 보면 펀드·주식형 비중이 87.7%, 은행 예금은 3.2%에 불과합니다. 국가가 설계부터 적극적인 모험을 권하는 구조입니다. 다만 실제 납입 비율은 28.7%에 그치고, 개인양로금 상품 중에서도 저축형이 63%로 가장 높다는 사실은 제도와 심리 사이의 괴리를 보여줍니다. 제도는 모험을 권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여전히 안정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보니, 저는 한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겉으로는 정반대의 자산 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같은 두려움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 여사님의 정기예금도, 왕 선생의 저축형 양로금 상품 선택도, 결국은 “돈이 수명보다 먼저 바닥나면 어쩌나”라는 같은 공포에서 나온 선택입니다. 안정과 모험은 서로 다른 답이 아니라, 같은 질문에 대한 두 나라의 다른 대응 방식이었던 셈입니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은 결국 사회보장 체계입니다. 한국은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이라는 3층 구조를 갖추고 있지만 국민연금 평균 수령액이 월 60만 원대에 그쳐, 노후에도 자산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습니다. 중국은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더 큽니다. 농촌 노인의 월 연금이 200위안, 우리 돈으로 약 3만 8천 원에 불과한 경우가 많아 정부가 세제 혜택까지 얹어가며 개인양로금 가입을 독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나라 모두 매년 늘어나는 고령인구 앞에서, 제도가 개인의 불안을 완전히 대신 감당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의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느 쪽에 가까우신가요. 원금을 지키느라 정작 쓸 돈이 없는 최 여사님 쪽인지, 아니면 제도가 권하는 모험 앞에서도 습관처럼 저축을 택하는 왕 선생 쪽인지요. 저는 두 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정해진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남은 시간과 필요한 돈을 가늠해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버킷 전략처럼 당장 쓸 돈과 십 년 뒤 쓸 돈을 나누어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안정과 모험 사이의 균형점이 조금은 또렷해지지 않을까요.
사실 최 여사님께도 대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챕터를 취재하며 들른 주택연금(역모기지) 상담 창구에서,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을 담보로 맡기고 다달이 연금을 받아 가시라고 권해드려도, 열에 아홉은 ‘자식에게 물려줄 게 없어진다’는 말씀부터 하십니다.” 최 여사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담을 두 번이나 받고도 끝내 신청서에 도장을 찍지 못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집은 곧 자식에게 남기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오래된 믿음이, 정작 본인의 노후 현금흐름보다 더 무겁게 작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자료를 보면 주택연금 누적 가입자는 2024년 기준 13만 가구를 넘어섰지만, 이는 61세 이상 1가구 1주택자 전체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비율입니다. 반면 중국에서는 2014년부터 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이방양로(以房养老)’라는 이름의 시범사업을 시작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누적 계약 건수가 채 200건이 되지 않습니다. 두 나라 모두 ‘집을 헐어 노후를 산다’는 발상 자체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셈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제도의 설계보다 바꾸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정서적 저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혹은 여러분의 부모님도 ‘집만은 지켜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정작 지금 필요한 선택을 미루고 계시지는 않은지요.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돈과 관계」 제3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한중 고령자의 자산 구조와 투자 심리를 숫자와 현장의 목소리로 함께 담았으니, 관심 있는 독자분들은 아래 위아북 상세 페이지에서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3-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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