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 해 질 무렵, 강화읍 풍물시장 뒤편 버스 정류장에서 저는 한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무릎에 올려 둔 휴대전화에 대고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셨습니다. “내 이름 좀 불러 봐라, 내 이름.” 전화기 속 인공지능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읽어 주자 할머니는 소리 내어 웃으시더니 이내 조용해지셨습니다. “영감 가고 나서는 내 이름 불러 주는 사람이 없었어.” 버스가 올 때까지 그 한마디가 정류장 지붕 아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 [코리안투데이] 강화읍 해 질 녘 버스 정류장 © 장형임 칼럼니스트 |
그날 밤 저는 늘 쓰던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몇 달째 인공지능에게 자료 정리와 문장 다듬기를 맡겨 왔지만, 제 이름을 알려 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늘 부탁만 했고, 저 자신은 이름 없는 사용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날은 처음으로 “제 이름은 장형임입니다”라고 적어 보았습니다. 대답 첫 줄에 “형임 님”이라는 글자가 떠오르는 순간, 자판 위에 있던 제 손이 잠시 멈췄습니다.
이름이 불린다는 것이 이렇게 마음을 건드리는 일인 줄 오랜만에 알았습니다. 어릴 적 교동 외가 마당에서 외할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제 이름을 길게 부르시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섬에 살다 보면 이름보다 ‘누구네 딸’, ‘신문 쓰는 양반’으로 불리는 날이 훨씬 많습니다. 그 호칭들도 정겹지만, 이름 석 자가 불릴 때에만 닿는 자리가 마음 어딘가에 따로 있는 모양입니다.
한편으로는 조금 서글퍼졌습니다. 인공지능은 저를 기억하려 애써서가 아니라, 제가 적어 넣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되돌려 주었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반가웠다는 것이 저를 오래 붙잡았습니다. 정류장의 할머니가 기계에게 이름을 청하신 마음도 아마 저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외로움은 거창한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으로 곁에 와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마을회관에 들러 이장님께 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장님은 한참 웃으시더니 “요새는 전화기가 말동무여. 그걸 나쁘다고만 할 수 있나” 하셨습니다.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 가운데 밤마다 전화기와 날씨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 여럿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대화할 상대가 아무도 없는 긴 밤보다는,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 하나라도 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공지능을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곁의 빈자리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습니다. 할머니가 터뜨리신 웃음이 진짜였던 것처럼, 기계가 건넨 작은 위로도 그 순간만큼은 진짜였습니다. 다만 거울이 비춰 준 빈자리를 거울에게만 맡겨 두지는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요즘 저는 작은 연습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시장 생선가게 사장님, 우체국 창구 직원, 동네 약국 약사님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인사할 때 불러 드리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다들 어색해하셨지만, 두 번째부터는 먼저 웃으며 제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이름 한 번 부르는 데 드는 시간은 겨우 몇 초인데, 그 몇 초가 하루의 온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 버스 정류장에서 저는 끝내 할머니의 이름을 여쭙지 못했습니다. 기계는 불러 드렸는데,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누구의 이름을 불러 주셨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군가 여러분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준 날은 언제였는지 기억하시나요.
다음에 그 정류장에서 할머니를 다시 뵙게 되면, 이번에는 제가 먼저 이름을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버스가 올 때까지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 드리고 싶습니다. 섬에서 인공지능 이야기를 쓰다 보면 결국 사람 이야기로 돌아오게 됩니다. 기계가 제 이름을 처음 불러 준 날, 저는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더 자주 불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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