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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5권 · 제14장 · 도장을 놓지 못한 손, 승계를 배우는 시간

기사입력 기사번호 57961

얼마 전 구로의 한 작은 공장 사무실에서, 저는 한 노인이 서랍에서 낡은 도장을 꺼내는 모습을 오래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삼십 년 넘게 이 회사의 모든 결재가 그 도장 하나로 시작되고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는 그 도장을 아들에게 건네지 못하고, 다시 서랍에 넣었습니다. “아직은 내가 찍어야 마음이 놓여서요.” 그 말을 듣는데, 저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쓸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먹먹함을 다시 느꼈습니다. 오늘은 평생 무언가를 쌓아온 노인이, 이제는 그것을 놓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실버 브릿지 주제 이미지

제가 만난 한국의 여러 창업주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도장은 내가 찍어야 안심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성공적으로 승계를 마친 기업들을 들여다보면, 결재권을 한꺼번에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대신 삼 년에서 오 년에 걸쳐 자금 집행권은 자녀에게, 인사권은 공동으로, 전략 결정권은 이사회로 조금씩 나누어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중국 CKGSB의 연구에서도 후계자가 평균 9.73년의 사내 훈련을 거친 가족기업일수록 승계 이후 재무 성과가 더 좋았다고 합니다. 급하게 넘긴 열쇠는 어딘가에서 꼭 헐거워지는 모양입니다.

숫자로 보면 이 문제의 크기가 더 선명해집니다. 한국에서 업력 30년이 넘은 중소기업 대표자의 80.9%가 60세 이상이고, 30.5%는 이미 70세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가업승계 성공률은 겨우 30%에 머물러 있습니다. 중국은 상황이 더 급박합니다. 앞으로 십 년 안에 창업주 300만 명이 은퇴 시점에 들어서는데, 승계 계획을 미리 세워둔 곳은 21%뿐입니다. 이는 글로벌 평균 49%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입니다. 창업주 본인의 44.3%는 “누구에게, 어떻게 물려줄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솔직히 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숫자를 처음 봤을 때, 이것이 경영의 문제가 아니라 이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겉모습이 다르지만 뿌리는 닮아 있습니다. 1960~70년대 한강의 기적을 만든 청년들과 1980년대 개혁개방을 이끈 중국의 청년들이, 지금은 똑같이 70~80대의 노인이 되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은퇴’라는 단어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다만 중국 쪽 사정이 조금 더 아픕니다. 중국 1세대 창업주의 자녀 80% 이상이 가업을 물려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가 상하이에서 만난 한 2세 경영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만든 회사가 아니라, 제가 만든 회사를 갖고 싶어요.” 부모 세대가 평생을 걸었던 것을, 자녀 세대는 짐으로 느끼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챕터를 쓰면서, 승계의 본질이 재산 이전이 아니라 정체성 이전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창업주가 평생 ‘결정하는 사람’이었다면, 원로는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시하던 사람이 듣는 사람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저는 여러 인터뷰에서 확인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과정을 ‘傳帮带(전방대)’, 즉 전수하고 돕고 이끈다는 뜻의 말로 부르고, 어떤 가문은 이를 아예 삼 단계 의식으로 정형화해두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십 년 쌓아온 거래처와의 신뢰를 후계자에게 공식적으로 소개하며 “이제 이 사람이 갑니다”라고 선언하는 그 장면이, 저에게는 어떤 졸업식보다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이 문제는 개별 가정의 사정을 넘어 사회 전체의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한국 고용의 절대다수를 떠받치고 있고, 중국에서는 가족기업이 GDP의 약 60%, 고용의 80%를 담당합니다. 창업주 한 세대의 은퇴가 조용히 지나가는 개인사가 아니라, 두 나라 경제의 허리가 동시에 흔들리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최근 중국 와하하 그룹의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이나, 한국 여러 가족기업에서 반복되는 승계 분쟁을 보면, 유언장이나 신탁, 가족 헌법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은 대가를 뒤늦게 치르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제가 취재 중 만난 한 원로 회장은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평생 내가 회사였는데, 이제는 회사가 나 없이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니,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은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바꾸는 것이라고. 마침 한국은 2025년을 지나며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0%를 넘어 이미 초고령사회에 들어섰고, 중국 역시 2025년부터 법정 정년을 단계적으로 늦추는 지연퇴직제를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언제 물러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국가 차원에서 다시 쓰고 있는 셈입니다. 제도가 나이의 경계를 늦춘다고 해서, 마음의 준비까지 저절로 늦춰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저는 이 취재를 통해 절감했습니다.

저는 이 챕터의 인터뷰들을 정리하며, 승계라는 단어가 사실은 ‘신뢰를 나누어 쓰는 연습’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녀에게 통장을 맡기는 일보다, 실수를 눈감아 줄 수 있는지가 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부모님은, 혹은 여러분 자신은 그 실수를 지켜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창업은 용기의 영역이지만 승계는 겸손의 영역이라는 말을, 저는 이번 취재를 하며 여러 번 곱씹었습니다. 도장을 넘기는 그 하루를 미루기보다,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건네는 연습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연습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는 여러 가족을 만나며 배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함께 늙어가는 법」 제14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도서 상세 페이지는 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5-kr/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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