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10분의 시간
1926년 7월 30일 금요일, 경성 거리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며칠 전 도쿄에서 날아든 전보 한 장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고 있었다.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갇혀 있던 가네코 후미코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장마가 걷힌 하늘은 맑았으나, 종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낯빛은 밝지 않았다.
그날의 경성
가네코 후미코는 관동대지진 직후인 1923년, 남편이자 동지인 박열과 함께 붙잡혔다. 일왕 암살을 꾀했다는 이른바 대역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지난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리고 지난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 안에서 목이 졸린 채 숨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형무소 쪽은 자살이라 발표했으나, 그를 변호해 온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흑우회·불령사 동지들은 석연치 않다며 의문을 거두지 않았다. 도쿄에서는 박열과 가네코가 나란히 찍힌 사진 한 장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저잣거리에 나돌기 시작했고, 총독부는 이를 두고 그저께인 29일부터 이 사진과 관련 문서를 신문·잡지에 싣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경성의 신문들은 아직 이 소식을 큰 활자로 다루지 못한 채 짧은 풍문으로만 전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2월 첫 공판에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스스로 “박문자”라 밝혔고, 3월 23일에는 도쿄 우시고메 구청에 혼인신고를 내어 박열의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조선 사람의 아내가 된 채로, 그는 조선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경성과 한반도
가네코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부터도 경성은 어수선했다. 지난 6월 10일 순종의 인산 날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학생들 가운데 아직 재판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총독부 학무국은 이달 초 이미 기소된 학생들에게 경성제국대학 입학을 불허한다는 방침을 밝혔고, 중앙고보에서는 스물한 명, 배재고보에서는 여덟 명이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채 여름을 나고 있었다. 전주에서도 일본인 교장을 학교 밖으로 내쫓았던 동맹휴학 끝에 쉰네 명이 퇴학당한 여진이 가시지 않았다. 조선 팔도 곳곳에서 젊은이들이 학교와 거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뜻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그날의 세계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국민혁명군을 이끄는 장제스가 지난 9일 광저우에서 5만 장병 앞에 서서 북벌을 선언한 뒤, 군대를 북으로 밀어 올리고 있었다. 군벌이 갈라놓은 땅을 하나로 묶겠다는 이 싸움은 훗날에야 끝을 보게 될 것이었다. 일본 안에서도 대역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한 여성의 죽음을 두고 신문마다 다른 목소리를 냈다. 식민지와 약소국의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사슬을 벗으려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경성 24시
이날 경성의 아낙들 사이에서는 가네코 후미코 이야기가 낮은 목소리로 오갔다. 조선 사람도 아닌 일본 여자가 남편의 뜻을 좇아 옥살이를 하다 세상을 떠났다는 사연은, 시집온 여인의 도리를 무겁게 여기던 당시 사람들에게도 낯설고 무거운 울림을 남겼다. 저잣거리 아낙들은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에 모여 앉아 이 소식을 나누었고, 여학교 다니는 딸을 둔 이들은 걱정과 감탄이 뒤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해거름이 되어서야 종로 거리의 술렁임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100년의 거울
100년 전 조선 여성은 남편을 따라 국경을 넘나들며 옥살이를 함께할 수는 있었어도, 스스로 신문 지면에 이름 석 자를 당당히 올리기는 어려웠다. 지금은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로 신문 1면을 채우고, 국경을 넘는 혼인도 법 앞에서 동등하게 인정받는다.
| 항목 | 1926년 | 2025년 |
|---|---|---|
| 국제결혼 | 남편 호적에 편입되는 방식만 인정 | 국적·성씨 선택 자유 |
| 여성의 발언 | 옥중 진술서로만 세상에 알려짐 | 언론·정치 전면에서 목소리 |
| 여성 교육 | 여학교 진학률 낮음 | 고등교육 이수율 남녀 역전 |

내일을 기다리며
내일 7월 31일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둘러싼 소식이 경성의 신문 지면에 좀 더 또렷하게 실릴 것이다. 🕙 내일 아침 10시 10분,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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