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담벼락 아래, 나무에 호미 한 자루가 걸려 있다. 오래 손에 익은 듯한 자루와 둥글게 휘어진 날, 그 주변을 감싸는 소박한 풍경까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홍근 시인은 그 호미에서 한 사람의 오래된 시간을 읽어낸다.
![]() [코리안투데이] 정홍근 시인의 「기억의 습작」 © 장시백 기자 |
「기억의 습작」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사진 속 호미가 대신 아버지의 시간을 불러낸다. 오랜 세월 밭을 오가며 손에 익었을 농기구 하나가 어느 순간 한 생애의 흔적이 되고, 사진 밖의 아버지까지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몸과 마음 다 녹슬었어도 / 오랜 습관은 예리하게 날이 서”
이 두 행에는 작품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세월 앞에서 몸과 마음은 예전 같지 않지만, 평생 몸에 밴 습관만은 쉽게 무뎌지지 않는다. ‘녹슬다’와 ‘날이 서다’가 맞물리면서 늙음과 생의 의지가 한 장면 안에 함께 놓인다.
정홍근 시인은 이어 “오늘도 밭두렁에 선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침이면 밭으로 향하고, 오래 익힌 손놀림으로 하루를 시작했을 사람. 몸은 늙어가지만 살아온 방식은 여전히 몸 안에 남아 있다. 그 습관은 단순한 노동의 반복이 아니라 한 사람이 평생을 건너온 삶의 자세에 가깝다.
마지막의 “한 문장이라도 더 남기려 / 손아귀에 꽉 힘을 주신다”는 대목에서 시는 한층 깊어진다. 여기서 ‘문장’은 종이 위에 적는 글만을 뜻하지 않는다. 흙을 일구고 풀을 베고 계절을 거두며 살아온 하루하루가 아버지가 써온 문장이다. 밭고랑에 남은 발자국도, 굳은 손의 기억도 한 생애의 기록이 된다.
제목 「기억의 습작」 역시 여운을 남긴다. 습작은 완성을 향해 써가는 글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삶 또한 하루씩 덧붙여 가는 긴 문장인지 모른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오늘도 한 줄을 더 보태고, 남은 힘을 모아 자신의 시간을 이어간다.
정홍근 시인의 「기억의 습작」은 아버지의 삶을 크게 말하지 않는다. 호미 한 자루와 몇 줄의 언어만으로 오래된 노동과 늙어가는 몸, 그리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삶의 습관을 불러낸다. 세월은 많은 것을 무디게 하지만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몸에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사진 속 호미의 날처럼, 그 기억은 아직도 조용히 날이 서 있다.
THE KOREAN TODAY × WIA CODE
이 기사의 WIA Code
WIA Code 스캐너로 비추면 인터넷 없이 발행 사실과 위·변조 여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휴대폰 기본 카메라로 찍으면 스캐너 안내 페이지가 열립니다 — 기사 바로 열기
움직이는 코드는 스트림입니다 — WIA Code 스캐너로 약 41초 비추면 기사 전문(사진 포함)이 폰에 저장되어 인터넷 없이도 읽을 수 있습니다.
WIA Code · 코리안투데이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