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해 전 베이징 첸먼 근처 장안대극원에서였습니다.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 객석 앞줄에 앉은 백발의 관객 몇 분이 손에 든 접부채를 가볍게 매만지며 무대를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제게 나지막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노래는 내가 젊었을 때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것과 똑같아요.” 저는 그 한마디에서 이 챕터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경극과 판소리, 두 나라의 오래된 무대가 실버 세대의 손끝에서 어떻게 다시 지펴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날 만난 왕 할머니는 매주 화요일 저녁이면 손주를 재워두고 스마트폰으로 경극 라이브 방송을 챙겨본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극장에 가야만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내 방에서 매일 저녁 배우를 만나요. 손주에게 이 노래 좋다고 추천도 해줍니다.” 실제로 챕터 취재 중 만난 중국희곡학원의 왕페이 부교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라이브커머스와 쇼트폼은 경극이 200년 만에 처음 맞닥뜨린 ‘민간 무대’다. 할머니들이 스마트폰으로 매일 저녁 경극을 보며, 손주에게 추천하는 시대가 왔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며, 무대가 사라진 게 아니라 옮겨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숫자로도 이 흐름은 또렷합니다. 2024년 중국 전국 공연시장은 총수입 796.29억 위안, 관객 1억 7,618만 명을 기록했고 그중 경극이 전체 희곡 공연 회차의 30%를 차지해 1위에 올랐습니다. 더우인 한 곳에서만 희곡 분야 크리에이터 수입이 전년 대비 232% 늘었고, 2,705명의 배우와 163개 극단이 ‘희곡 라이브 계획’에 참여해 누적 시청 1억 명을 넘겼습니다. 청년 스타 궈위앙의 희강 리믹스는 5.2억 회 재생되었는데, 그 시청자의 15%가 실제 극장 관객으로 이어졌다는 조사 결과를 접하고 저는 잠시 멈춰 서 있었습니다. 화면 속 호기심이 극장 좌석으로 옮겨가는 그 다리를, 저는 이 시리즈의 제목처럼 ‘브릿지’라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서울 국립극장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21년째 이어온 송년 판소리 공연장에서 만난 한 관객은 매년 같은 자리를 예매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 한 해가 잘 마무리되는 것 같아요.” 2024년 창극 <리어>가 전석 매진을 기록했을 때 객석의 절반 가까이가 60대 이상이었다는 통계를 국립창극단 관계자에게 전해 들으며, 저는 문득 베이징에서 만난 왕 할머니를 떠올렸습니다. 언어도 무대도 다르지만, 두 분 모두 ‘오래 들어온 소리’를 젊은 세대에게 건네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습니다. 다만 한국의 국악 유튜브 채널 구독자 총합이 500만 명 선으로, 중국 희곡 채널의 1/20 수준에 머문다는 사실은 아직 우리가 그 다리를 절반쯤만 놓았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두 무대를 나란히 취재하며 깨달은 것은, 실버 관객이 ‘지켜야 할 유산’으로만 다뤄질 때와 ‘번역해야 할 원본’으로 다뤄질 때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경극의 232%라는 수치는 전통을 박제하지 않고 오늘의 언어로 옮긴 결과였고,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3억 뷰 역시 판소리 사설을 그대로 두되 리듬만 다시 입힌 결과였습니다. 두 사례 모두 원본을 지킨 사람은 결국 그 소리를 몸으로 기억하는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번역의 주체’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은 두 나라가 겪고 있는 고령화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중국은 60세 이상 인구가 이미 2억 9천만 명을 넘어섰고, 한국은 2025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습니다. 두 사회 모두 노년 세대를 부양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시선에서, 콘텐츠와 서사를 생산하는 주체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조금씩 옮겨가고 있습니다. 판소리 명창의 구연 문화, 경극 배우의 몸짓 하나하나가 디지털 화면 위에서 다시 가치를 인정받는 지금이, 어쩌면 두 나라 실버 세대에게 가장 능동적인 시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여쭙고 싶습니다. 우리 곁의 어르신 중에도 오래 묵혀둔 노래나 이야기를 가진 분이 계시지 않을까요. 그 소리를 손주 세대의 언어로 함께 옮겨보는 일, 거창한 사업이 아니어도 가족의 저녁 식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취재를 다니며, 세대를 잇는 다리는 결국 누군가 먼저 귀 기울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배웠습니다.
저는 이 챕터를 쓰며 국립극장 기획팀장님과 나눈 대화도 다시 떠올렸습니다. “완창 판소리 여덟 시간 무대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을 보면, 그분들이 관객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는 마지막 증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 말은 제가 그동안 실버 세대를 취재하며 들었던 문장 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완창이라는 형식 자체가, 요약되지 않는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통계청에 따르면 2025년 65세 이상 인구는 1,000만 명을 넘어섰고, 문화체육관광부의 노인 문화향유 지원 예산은 매년 소폭이나마 늘고 있습니다. 중국 역시 ‘적극적 고령화(积极老龄化)’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하고, 문화여유부 산하 노년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경극·서예·전통음악 강좌를 무료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정책 언어는 다르지만 방향은 비슷합니다. 노년을 ‘돌봄의 대상’에서 ‘문화의 생산자’로 다시 규정하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이 흐름을 취재하면서, 정책은 예산표가 아니라 왕 할머니 같은 한 사람의 화요일 저녁 습관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세대는 지금 어떤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계신가요.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디지털 실버」 제14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경극과 판소리 두 무대의 통계와 인터뷰, 그리고 한중 기업이 실버 전통예술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더 깊이 다루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4-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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