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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7일 토요일 전체기사 로그인 회원가입 한국어 ENG 中文 日本語 Tiếng Việt

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5권 · 제22장 · 그 노인은 왜 유서 대신 영상을 남겼을까

기사입력 기사번호 58612

올봄, 베이징 쉬안우구의 낡은 5층 건물 안에서 저는 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카메라 렌즈 앞에 앉아 아들에게 남길 말을 고르던 리(李) 할머니였습니다. 종이 위에 글자를 적는 게 아니라, 마이크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남기는 그 방식이 저에게는 낯설고도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그 장면에서 시작해, 한국과 중국의 노년 세대가 ‘마지막 말’을 남기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고 또 닮아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실버 브릿지 주제 이미지

제가 만난 리 할머니는 준비해 온 원고도, 정갈하게 접은 편지도 없었습니다. 대신 촬영 기사 앞에 앉아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들아, 내 보석함은 유물이 아니다. 네 아내에게 주거라. 그 애가 나에게 지은 미음을 나는 잊지 않는다.” 재산을 나누는 말인데도 그 안에는 며느리가 끓여준 미음 한 그릇의 온기가 먼저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 유언이라는 것이 결국 숫자가 아니라 기억을 남기는 일이라는 걸 다시 배웠습니다.

이런 장면이 더 이상 드물지 않다는 걸 통계가 말해줍니다. 중화유언库(中华遗嘱库)는 2024년 말까지 누적 57만 2,141명의 상담과 35만 7,512건의 유언 등록을 기록했습니다. 한국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자도 250만 명을 넘어섰고, 전국 등록기관은 429개소에 이릅니다. 흥미로운 건 유언을 쓰는 나이가 점점 젊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에서는 평균 작성 연령이 77.43세에서 67.71세로 10년 새 아홉 살 넘게 낮아졌고, 한국 웰다잉문화운동본부 조사에서도 엔딩 노트 작성자의 평균 연령이 66.4세로 파악됩니다. “죽음을 준비할 나이”가 아니라 “은퇴 직후 정리해두는 나이”로 바뀐 셈입니다.

구로구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73세 김(金) 어르신의 하루는 리 할머니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뒤, 세 시간 동안 또박또박 손으로 엔딩 노트를 써 내려가셨습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본 그 문장들은 대부분 짧았습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실제로 서울대 의대 정현채 교수 연구팀이 호스피스 환자 812명을 인터뷰한 결과, 한국 노인 임종유언의 72%가 이 세 문장 안에 수렴한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는 유언을 쓰는 이유의 1위가 ‘상속 절차 단순화'(33.38%), 2위가 ‘가족 분쟁 회피'(31.62%)였습니다. 한쪽은 관계를 매듭짓는 말이었고, 다른 한쪽은 집안을 정돈하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고 볼 때마다, 유언이라는 것이 그 사회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그대로 비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의 노인들이 관계 회복과 용서에 방점을 찍는 데는 유교적 예(禮)와 종교적 화해의 정서가 겹쳐 있을 것입니다. 반면 중국의 유언에는 재산과 가훈(家訓), 그리고 공덕을 함께 적어 넣는 ‘전승(传承)’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중화유언库 주임 천카이(陈凯)의 말대로 “예전에는 체면 때문에 말 못 하던” 것을, 이제는 세상에 나와 스스로 밝히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세대의 해방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인구·사회적 흐름이 있습니다. 한국 65세 이상 가구의 평균 순자산이 4억 8천만 원을 넘기면서, 법정상속만으로는 정리가 어려운 재산 구조가 늘었습니다. 가족의 형태도 바뀌었습니다. 한국의 독거노인은 239만 명, 중국의 ‘공소(空巢, 빈 둥지)’ 노인은 1억 2천만 명에 이릅니다. 곁에서 말해줄 자녀가 없는 세대가 늘어난 만큼, 말을 미리 남겨두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여기에 카카오톡·위챗 계정, 클라우드 사진, 게임 아이템 같은 디지털 자산까지 등장하면서, 중화유언库는 2023년부터 ‘디지털 유언’ 전용 양식을 도입해 2024년 한 해 4,200건을 처리했습니다. 유언의 범위가 재산에서 관계로, 다시 디지털 흔적으로 넓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원고를 정리하며 스스로에게도 물었습니다. 제가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가장 따뜻한 한 문장은 무엇일까. 아마 재산 이야기보다, 누군가에게 못다 한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먼저 떠오를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셨으면 합니다. 부모님과, 또 자녀와 그 말을 미리 나눠본 적이 있으신지요. 미루다 보면 결국 못다 한 말로 남는 경우를 저는 취재 현장에서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리 할머니의 영상과 김 어르신의 엔딩 노트,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250만 건과 35만 건이라는 숫자는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말해도 된다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세대적 변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함께 늙어가는 법」 제22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도서 상세 페이지는 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5-kr/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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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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