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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5권 · 제21장 · 상하이 공원에서 만난 왕 선생님의 QR 코드

기사입력 기사번호 58548

지난달 상하이 인민공원의 결혼 시장, 이른바 ‘샹친자오(相亲角)’에 들렀을 때 저는 일흔둘의 왕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우산을 펼쳐놓고 자기소개 종이를 매단 채 서 계신 어르신들 사이에서, 왕 선생님은 유독 눈이 반짝였습니다. 서울에서 왔다는 할머니와 QR 코드를 주고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엔 나라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했지만, 이제는 내가 고른 사람과 남은 20년을 보내고 싶소.”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습니다.

실버 브릿지 주제 이미지

왕 선생님은 한국 드라마에서 본 ‘낭만’을 잊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2024년 가을 베이징에서 우연히 만난 두 분은 카카오톡과 위챗을 오가며 벌써 1년째 연애 중이라고 했습니다. 사별과 황혼이혼을 겪은 두 나라의 어르신들이 국경 너머에서 ‘두 번째 사랑’을 찾는 모습을, 저는 그 공원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두 분의 태도가 인상 깊었습니다.

돌아와 자료를 뒤져보니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통계청 2024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60세 이상 남성 혼인은 7,952건으로 10년 전보다 53% 늘었고, 여성 혼인은 5,316건으로 120%나 증가했습니다. 65세 이상 여성 재혼자는 2015년 1,069명에서 2024년 2,430명으로 2.4배 뛰었습니다. 중국에서도 상하이 인민공원과 베이징 창푸허 공원은 주말마다 수백 명의 노년 구혼자로 붐빈다고 합니다. 결혼정보회사 바이허가 내놓은 노년 전용 앱 ‘휴식의 섬’은 누적 가입자가 3,20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낯설지만, 왕 선생님의 표정을 떠올리면 이 숫자들이 전부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같은 주에 서울 탑골공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봤습니다. 자식들을 다 키워 보낸 김 할머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들 다 키웠고, 이젠 나를 위해 살고 싶어요.” 왕 선생님과 김 할머니, 두 분이 쓰는 언어도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하시는 말씀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50·60대의 63.8%가 재혼에 긍정적이라고 답했고, 중국 베이징대 노령연구소 조사에서는 50세 이상의 71.2%가 재혼 의향을 밝혔습니다. 두 나라가 같은 시기에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국경보다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 두 만남을 취재하면서 ‘황혼의 사랑’을 더는 곁가지 이야기로 다룰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기대수명이 늘어난 만큼(한국 83.5세, 중국 78.6세) 사별이나 이혼 후에도 20년 넘는 시간이 남습니다. 그 시간을 혼자 견디는 것과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삶의 결 자체를 바꿔놓습니다. 한국의 1인 노인가구가 239만 가구에 이르고 중국의 독거노인이 1억 2천만 명에 달한다는 수치 앞에서, 왕 선생님이 내민 QR 코드는 단순한 연락처 교환이 아니라 고독에 대한 나름의 응답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국경을 넘는 사랑에는 낭만만큼 무거운 현실도 따라옵니다. 언어의 미묘한 온도차, 한국과 중국의 서로 다른 상속·재산 제도, 그리고 자녀들의 반대가 대표적입니다. 2024년 서울가정법원의 국제이혼 재판 중 55세 이상 비중은 27%로, 10년 전 11%의 두 배를 훌쩍 넘었습니다. 한국 자녀들은 재산을 둘러싼 걱정을, 중국 자녀들은 부모가 해외로 떠나면서 생길 부양 공백을 걱정한다고 합니다. 왕 선생님도 이 대목에서만은 잠시 말을 아끼셨습니다.

그럼에도 두 나라 모두 초고령사회로 접어드는 지금, 저는 이 흐름을 먼저 존엄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1,024만 명으로 전체의 20.1%에 이르렀고, 중국의 60세 이상 인구는 3억 1천만 명, 22%를 넘어섰습니다. 두 나라가 거의 같은 속도로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정책과 제도를 설계하는 이들에게도 더는 미룰 수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노년의 재혼과 연애를 뒷받침할 법적·제도적 장치는 두 나라 모두에서 아직 충분히 갖춰졌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실버 브릿지」를 쓰기 위해 다시 편 취재 노트에는 왕 선생님이 헤어지며 남긴 문장이 또렷이 적혀 있습니다. “자식들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소.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김 할머니 역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행복해야 자식들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걸, 요즘에야 알겠어요.” 두 분 다 자녀에게 알리는 일을 가장 조심스러워하셨고, 저는 그 조심스러움 자체가 두 나라 노년 세대가 함께 짊어진 정서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제도의 속도는 이 마음을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2024년 노인복지법 개정 논의에서 황혼 재혼 가구의 상속·부양 분쟁을 조정할 상담 창구 신설이 거론됐지만 입법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2023년 개정된 노인권익보장법에 ‘노인의 혼인의 자유’를 명문화했지만, 실제로 재산 공증과 혼전계약을 안내하는 지역은 상하이·베이징 등 대도시에 그치고 있다고 현지 사회복지사는 전했습니다. 저는 두 나라 모두 마음은 앞서가고 제도는 뒤늦게 따라가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부모님이, 혹은 언젠가의 나 자신이 왕 선생님처럼 QR 코드를 내밀 용기를 낸다면, 우리는 그 선택을 얼마나 편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상하이와 서울 두 공원을 오가며 내내 품고 다녔습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지만, 그 사랑을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아직 국경과 나이가 남아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돌아보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함께 늙어가는 법」 제21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왕 선생님과 김 할머니를 비롯해 제가 만난 더 많은 분들의 이야기, 그리고 한중 실버 로맨스 시장을 둘러싼 구체적인 통계와 분석은 도서 상세 페이지(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5-kr/)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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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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