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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5권 · 제11장 · 0.02밀리미터의 비밀, 손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지다

기사입력 기사번호 57629

몇 해 전 경기도의 한 금형 공장에서 만난 예순여덟 살의 장인은 저에게 도면 한 장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이 숫자는 0.02밀리미터입니다. 근데 도면에는 이게 안 보여요. 손으로만 알아요.” 그 옆에서 스물여섯 살 청년 직원이 그의 손끝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책에도, 매뉴얼에도, 심지어 요즘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하는 인공지능에도 담기지 않는 지식이 한 사람의 손끝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그날 제가 만난 장인은 자신을 “은퇴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 현역입니다, 다만 자리가 바뀌었을 뿐이죠”라고 했습니다. 30년 넘게 쌓아온 경험, 실패의 흉터, 사람을 보는 눈 — 그것을 젊은 후배에게 옮겨주는 일을 그는 은퇴가 아니라 ‘전수’라고 불렀습니다. 한국 보건복지부의 시니어인턴십 세대통합형 멘토 사업이 바로 이런 만남을 제도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60세 이상 숙련기술 퇴직자가 청년사원과 1:1로 짝지어지고, 기업에는 1회 300만원의 지원금이 나갑니다. 그 공장의 사장님은 저에게 “이 돈보다 중요한 건, 저 어른이 우리 회사에 있다는 사실 자체”라고 했습니다.

실버 브릿지 주제 이미지

제가 취재를 하며 자주 마주친 숫자가 있습니다. 2024년 한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19.2%였고, 2025년에는 마침내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들어섰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의 60세 이상 인구는 3억 1,000만 명,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넘습니다. 통계청의 「2024 고령자통계」를 들여다보면 일하는 노인의 비중은 해마다 늘고 있고, 65세 이상의 단체활동 참여율은 57.1%, 평생교육 참여율은 23.5%에 이릅니다. 제가 어릴 때 상상했던 ‘집에 머무는 노인’이라는 이미지는 이제 통계로도 깨진 지 오래입니다. 사람이 줄어드는 시대일수록, 한 사람이 품고 있는 경험의 무게는 오히려 무거워진다는 것을 저는 이 숫자들 앞에서 새삼 실감했습니다.

중국에서 만난 은퇴 교사 한 분의 이야기도 잊히지 않습니다. 산둥성에서 30년을 가르치다 은퇴한 그는 「국가은령교사행동계획」을 통해 간쑤성의 한 시골 중학교로 파견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건 늙은 몸뚱이가 아니라 30년치 학생들의 얼굴입니다.” 그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중국 교육부 등 10개 부처가 합동으로 운영하는 이 제도는 2018년 이후 누적 2만 명이 넘는 퇴직 교장·특급교사·장인을 서부 낙후 지역으로 보냈고, 2025년에는 7,000명을 추가로 모집했습니다. 한국이 시장의 논리로, 즉 기업과 지원금을 통해 노인의 경험을 산업 현장에 되돌린다면, 중국은 국가의 의지로 백발의 분필을 서부의 칠판에 다시 쥐어주고 있었습니다. 같은 문제 앞에서 두 나라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신기하면서도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 공장을 다시 찾았을 때 만난 청년 직원, 스물여섯 살 김모 씨의 말도 제 수첩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처음엔 그냥 월급 받는 인턴인 줄 알았어요. 근데 사부님 손 움직임을 석 달쯤 보다 보니, 이게 그냥 기술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배우는 거더라고요.” 시니어인턴십 세대통합형 멘토 사업에 참여한 기업은 2024년 기준 전국에서 400곳을 넘어섰고, 참여 멘토의 평균 연령은 63세, 멘티와의 근속 동반 기간은 평균 8개월이었다고 담당 부처 관계자는 저에게 설명했습니다. 숫자로 보면 그저 통계지만, 제가 현장에서 본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한 사람의 손끝으로 옮겨가는 느린 이양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나라의 제도를 나란히 놓고 보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노년을 ‘돌봄받는 존재’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만난 장인과 교사는 누구에게도 돌봄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 만남들이 단순한 일자리 사업이 아니라, 사라질 뻔한 기억을 다음 세대의 손끝에 옮겨 심는 작업이라는 걸 느꼈습니다. 경험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재배치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습니다.

이 흐름의 배경에는 좀 더 근본적인 인구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와 중국의 ’50허우’ 세대가 동시에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제조·교육·의료 현장의 핵심 노하우가 한꺼번에 끊길 위기에 놓였습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24년 0.75명까지 떨어졌고, 중국 역시 1.0명대로 내려앉았습니다. 청년 인구가 줄어드는 시대에는 한 사람의 숙련도, 한 사람의 관계망이 그만큼 더 소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언어모델이 아무리 정형화된 지식을 학습해도, 30년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직관과 맥락까지는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여러 취재 현장에서 거듭 확인했습니다.

중국 쪽 자료를 더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대비가 보입니다.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에 따르면 2035년 무렵이면 60세 이상 인구가 4억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 규모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는 ‘실버 경제’라는 이름으로 노년 인력 활용을 국가전략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이 개별 기업 단위의 지원금으로 접근한다면, 중국은 성(省) 단위 파견 계획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저는 두 나라의 국가운영 방식 자체가 드러난다고 느꼈습니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질문은 같습니다 — 우리는 나이 든 사람의 경험을 사회의 자산으로 계산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비용으로만 계산하고 있는가, 저는 이 물음을 취재 내내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혹은 여러분 자신이 은퇴를 앞두고 있다면, 그 안에 쌓인 30년의 경험을 누구에게 건네주고 싶으신가요. 저는 취재를 다니며 만난 어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보다 “내가 아직 쓸모 있다”는 확인을 더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노년을 사회의 짐이 아니라 자본으로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그것이 한중 양국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나마 함께 걸어가고 있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함께 늙어가는 법」 제11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도서 상세 페이지는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5-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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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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