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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3권 · 제8장 · 유언장 한 장이 가족을 살릴 때 — 상속을 말하지 않는 나라들

기사입력 기사번호 53921

실버 브릿지 · 제3권 제8장 (hero)

몇 해 전 상하이 외곽의 한 노인복지관에서 만난 왕(王) 여사님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여든을 넘긴 그분은 제게 종이 한 장을 조심스레 꺼내 보이며 “이건 제 마지막 편지예요”라고 하셨습니다. 중화유촉고(中华遗嘱库)에 등록한 유언장 사본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어떻게 나눌지가 아니라, 왜 그렇게 나누는지를 담담히 적어 내려간 편지 같은 문서였습니다. 그 종이 한 장을 손에 쥔 왕 여사님의 표정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홀가분함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만남에서 시작해, 한국과 중국이 유산상속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얼마나 다르게 풀어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제 책 「실버 브릿지」 제3권 제8장을 쓰면서 가장 마음에 남은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유산상속은 단순한 재산 이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 전하는 삶의 철학이자,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약속입니다.” 왕 여사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유언장을 그저 법률 서류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그것은 자녀들에게 “너희를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다”고 말하는 마지막 방법이었습니다. 그 대화를 나눈 뒤로 저는 상속을 세율이나 조문이 아니라, 가족이 서로에게 남기는 말로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숫자로 보면 두 나라의 풍경은 거울처럼 정반대입니다. 한국의 상속세 명목 최고세율은 50%이고, 최대주주 지분이 절반을 넘으면 20% 할증이 붙어 실질 최고세율이 60%에 이릅니다. 상속세를 부과하는 OECD 18개국 평균이 27.1%라는 점을 떠올리면, 한국의 부담은 평균의 두 배가 훌쩍 넘는 셈입니다. 반면 중국에는 상속세 자체가 없습니다. 1950년, 1993년, 2013년, 그리고 2024년 전국인민대표대회까지 네 차례나 도입이 논의되었지만 그때마다 “시기상조”라는 결론으로 미뤄졌습니다. 너무 무거운 세금을 어떻게 덜어낼지 고민하는 나라와, 아예 없는 세금을 들여올지 말지 저울질하는 나라 — 저는 이 대비가 두 사회가 재산을 바라보는 마음의 온도차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느꼈습니다.

왕 여사님을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서울에서 정반대의 장면을 마주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석 달째라던 한 자매는 법정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십여 년간 어머니를 모신 사람이었고, 동생은 유학 이후 거의 왕래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법정상속분에 따르면 두 사람의 몫은 같았습니다. 언니는 제게 “제가 잘못 산 걸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듯, 2024년 4월 25일 한국 헌법재판소는 유류분 제도에 일부 위헌 및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형제자매의 유류분권을 규정한 민법 제1112조 제4호를 단순위헌으로 선언하고,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속인의 유류분을 제한할 근거가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자에게까지 일률적으로 유류분을 보장하는 것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같은 시기 전혀 다른 흐름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2013년 설립된 중화유촉고는 2024년 말 기준 누적 유언 상담 57만여 건, 등록·보관 35만 7,512건을 기록했습니다. 그해에만 60세 이상 노인의 유언 등록이 4만 건을 넘었는데, 그중 60.28%가 자녀와 떨어져 사는 이른바 ‘공소(空巢)’ 노인이었습니다. 왕 여사님도 그중 한 분이었습니다. 2021년 시행된 중국 민법전은 자필·대필유언뿐 아니라 영상유언, 녹음유언, 인쇄유언까지 다섯 가지 형식을 인정하고,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니라 가장 최근에 작성된 유언이 우선하도록 바꾸었습니다. 자녀와 멀리 떨어져 살수록 오히려 마음을 글로, 영상으로 남기려는 부모가 늘어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오래 남았습니다.

이 두 만남을 나란히 놓고 보면서 저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한국 자매의 침묵과 왕 여사님의 종이 한 장은 사실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족에게 어떤 사람이었나, 그리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한국은 오랫동안 “생전에 재산 이야기를 꺼내면 불효”라는 인식과 “유언장을 쓰면 곧 죽는다”는 거부감 속에서 이 질문을 미뤄왔습니다. 그 미룸의 결과가 법정에서 마주 앉은 자매의 얼굴이었습니다. 중국은 반대로 그 질문을 서둘러 꺼내 놓았지만, 상속세가 없는 만큼 부의 대물림이 그대로 굳어질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어느 쪽도 완전한 답은 아니지만, 두 나라 모두 “사전에 준비한다”는 것의 무게를 뒤늦게라도 배우고 있다는 점만은 같았습니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두 사회가 함께 겪고 있는 인구와 가족 구조의 변화가 있습니다. 자녀와 떨어져 사는 노년 인구가 늘고, 다자녀 가정보다 형제자매 수가 적은 가정이 흔해지면서, 예전처럼 “가족이 알아서 나누겠지”라는 기대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국회는 2025년 12월 31일까지 유류분 관련 법 개정을 마쳐야 하고, 그 사이 상속을 준비하는 가정은 법이 바뀌는 과도기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중국 역시 베이징·상하이·광둥 세 지역에 유언 등록이 77%나 몰려 있다는 통계에서 보듯, 도시와 지방, 세대와 세대 사이의 격차가 상속의 방식마저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칼럼을 읽는 분들께 세율이나 법 조문보다 먼저, 이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 어색한 대화를 언제, 누가 먼저 꺼낼 것인가. 왕 여사님은 제게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삶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서울의 그 자매는 그 대화를 나누지 못한 대가를 법정에서 치르고 있었습니다. 세금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생전에 가족과 나누는 대화이고, 법적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향한 진심 어린 메시지라는 것을, 저는 두 만남을 통해 배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돈과 관계」 제8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상속 제도를 둘러싼 더 많은 통계와 사례, 그리고 두 나라 노년 세대의 목소리가 궁금하신 분은 위아북 상세 페이지(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3-kr/)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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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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