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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5권 · 제4장 · 상하이 팔찌, 항저우 요양보호사 — 존엄을 짓는 두 언어

기사입력 기사번호 57093

몇 해 전 상하이 창닝구의 한 커뮤니티 센터를 찾았을 때, 저는 그곳을 그저 또 하나의 ‘경로당’쯤으로 여기고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로비에 붙은 안내판에 적힌 단어 하나가 발걸음을 멈춰 세웠습니다. ‘尊严养老’ — 존엄한 노년. 복지 시설의 구호치고는 낯설게 당당했습니다. 그날 제가 만난 건 돌봄을 받는 노인이 아니라, 소비하고 요구하고 선택하는 새로운 세대였습니다. 오늘은 그 장면에서 시작해, 한중 양로산업이 왜 더 이상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경제의 주어’가 되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실버 브릿지 주제 이미지

그 센터에서 만난 70대 부부는 낙상 감지 IoT 팔찌를 차고 있었고, 자녀가 결제해준 원격 건강 모니터링 앱을 매일 들여다본다고 했습니다. 제가 취재 노트에 옮겨 적은 그날의 인상은 이랬습니다. “중국의 새로운 노년 세대는 단순한 보살핌이 아니라 발전 지향적 소비를 추구한다. 스마트 헬스케어, 웨어러블 디바이스, 시니어 친화 관광, 라이프스타일 제품 등 새로운 산업이 동시에 일어서고 있다.” 푸단대학 노령연구원의 이 문장을, 저는 그 부부의 손목에서 실물로 확인한 셈이었습니다.

숫자로 옮겨보면 이 변화의 크기가 더 선명해집니다. 2024년 말 기준 중국의 60세 이상 인구는 3억 1,031만 명, 전체의 22%에 이릅니다. 같은 해 중국 실버경제 규모는 7조 위안, 우리 돈으로 약 1,265조 원이었고 이는 중국 GDP의 6%에 해당합니다. 중국 사회과학원과 푸단대학 노령연구원은 이 시장이 2035년까지 30조 위안, 약 5,460조 원까지, GDP의 10% 수준까지 커질 것으로 내다봅니다. 한국도 다르지 않습니다. 보건산업진흥원 통계로는 고령친화산업이 연평균 13%씩 성장해 2020년 72조 원에서 2030년 168조 원으로 두 배 넘게 불어날 전망이고, 우리는 이미 2025년 65세 이상 인구 비율 20.6%로 초고령사회에 들어섰습니다.

다만 같은 방향으로 가는 두 나라의 걸음걸이는 사뭇 다릅니다. 중국은 국가가 앞장서서 걷습니다. 국무원이 2024년 1월 사상 처음으로 ‘실버경제 발전과 노년 복지 증진에 관한 의견’을 국가 전략으로 발표했고, 2025년에는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이 함께 26개 세부 조치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베이징·상하이·항저우를 포함한 31개 성·시가 저마다의 실버경제 계획을 갖고 있고, 상하이는 재가 90%·커뮤니티 7%·기관 3%로 짜인 ’90·7·3 양로 모델’을 제도화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민간이 먼저 걷습니다. 삼성노블카운티, KB골든라이프케어, 더케이호텔처럼 대기업과 금융그룹이 프리미엄 시니어타운을 열고 실버푸드와 항노화 화장품 시장을 개척하는 동안, 정작 정부의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서 고령친화산업 예산은 2024년 사실상 전액 삭감됐습니다. 시장은 뛰는데 지도가 없는 형국입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멈춰 생각한 건, 두 나라가 같은 고령화를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것이 국가 인프라의 언어였고, 한국에서는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의 언어였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저는 쉽게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중국형은 존엄이라는 원칙 아래 누구나 편입될 자리를 만들려 하고, 한국형은 지불 능력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갈리는 구조를 남겨둡니다. ‘내 돈 내고 들어가는’ 시니어타운 바깥에, 여전히 많은 중산층과 저소득층 노년이 서 있다는 것을 그 부부의 팔찌를 보며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크게 보면 이 흐름은 두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세계 50세 이상 인구를 상대하는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 지금 열리고 있습니다. 화룬·완커·타이캉 같은 중국의 부동산·보험 대기업이 연속돌봄 은퇴공동체, 이른바 CCRC에 수십조 원을 투입하는 것도, 한국 기업들이 낙상 감지 IoT나 원격 모니터링 같은 에이지테크를 중국 양로 기관에 SaaS 형태로 공급할 길을 찾는 것도 결국 같은 흐름 위에 있습니다. 중국 시니어 구매의 60% 이상을 자녀 세대가 결제한다는 사실은, 이 시장이 노인만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잇는 소비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항저우에서 만난 한 요양보호사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효도를 손으로 하지 않고 시스템으로 합니다. 자식이 매일 찾아오지 못해도, 부모가 존엄을 잃지 않도록 설계하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며 한국의 어느 요양원에서 마주쳤던 풍경을 떠올렸습니다. 자녀가 오지 못하는 주말이면 유독 조용해지던 복도, 그리고 그 정적을 채우던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두 나라 모두 효(孝)라는 오래된 언어를 여전히 쓰고 있지만, 그 언어를 구현하는 방식은 이렇게 갈라져 있었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1인 가구 비율은 2024년 기준 전체 노인가구의 36%를 넘어섰고, 중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 자료로도 도시 지역 공소노인(空巢老人, 자녀와 떨어져 사는 노인) 비율이 50%에 근접합니다. 숫자만 보면 두 나라는 같은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통계를 취재하며 자꾸 다른 질문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혼자 사는 노년이 늘어나는 것 자체보다, 그 혼자됨을 사회가 얼마나 촘촘히 받쳐주느냐가 결국 존엄의 진짜 척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혹은 여러분 자신은 그 물음에 어떤 답을 갖고 계신가요.

그래서 저는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그리고 언젠가 우리 자신의 노년을 여전히 ‘부담’이라는 낡은 프레임으로만 계산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상하이의 그 부부가 팔찌 하나로 자녀에게 안심을 건네고, 스스로는 존엄이라는 단어를 당당히 마주하던 모습을 저는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돌봄을 성장으로, 부담을 동력으로 다시 읽어내는 일이 지금 한중 양국 모두에게 던져진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함께 늙어가는 법」 제4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도서 상세 페이지는 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5-kr/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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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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