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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수진

[실버 브릿지] 제5권 · 제13장 · 손목 파스 냄새로 남은 사랑, 격대교육의 무게를 묻다

기사입력 기사번호 57822

서대문구의 한 노인복지관 로비에서, 저는 손주의 그림책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순서를 기다리는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인터뷰를 청하자 그분은 손사래부터 치셨습니다. “이게 뭐 대단한 얘기라고.”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자 삼십 분이 훌쩍 넘어갔습니다. 저는 그날 수첩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뒤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몸이 있다고.

실버 브릿지 주제 이미지

그 할머니는 주 5일, 하루 열 시간 가까이 다섯 살 손자를 돌보고 계셨습니다. 며느리가 출근하면 아이를 맡아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저녁이 되면 다시 데려와 씻기고 재우는 일까지가 하루 일과였습니다. 저는 이 챕터를 쓰며 이 장면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격대교육은 사랑의 이름으로 치르는 세 세대의 합작 부담이다. 아이에게는 안정을, 부모에게는 경제를, 조부모에게는 건강이라는 대가를 묻는다”는 난징대학 장영매 교수의 말이, 그 할머니의 손목 파스 냄새와 겹쳐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챕터를 위해 찾아본 숫자들은 그 무게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고용노동부 조사에서 맞벌이 부모의 48.8%가 “조부모의 도움 없이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답했고, 전담으로 손주를 돌보는 외조모의 주 평균 돌봄시간은 42시간에서 47시간에 이릅니다. 웬만한 직장인의 근로시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으로 눈을 돌리면 이 숫자는 더 커집니다. 베이징·상하이·광저우 같은 1선 도시에서는 0~3세 영유아의 94%가 조부모 손에서 자랍니다. 저는 이 수치를 처음 접했을 때, 이것이 통계가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생활양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같은 해 가을, 저는 상하이 푸둥구의 한 사구(社区) 노인대학에서도 비슷한 얼굴을 만났습니다. 손녀와 함께 사는 외할머니였는데, 한국의 할머니와 달리 그분은 며느리 집에 아예 들어가 살고 계셨습니다. “돌봄비요? 그런 걸 받으면 오히려 이상하게 봐요. 효도는 계산하는 게 아니니까요.” 한국의 조부모가 평균 70만 원에서 100만 원의 ‘돌봄비’를 받는 것과 달리, 중국에서는 그 노동이 여전히 효(孝)의 의무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같은 격대교육이라도 한국은 출퇴근형 부분 돌봄에 가깝고, 중국은 동거형 전면 양육에 가깝다는 구조적 차이를, 저는 그 순간 몸으로 확인했습니다.

저는 이 두 만남을 나란히 놓고서야 비로소 이 챕터의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격대교육이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라, “이 부담을 누가, 어떻게 나누어 지는가”였습니다. 한국건강증진개발원 보고서는 주 40시간 이상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의 허리·무릎 통증 유병률이 동년배 대비 1.8배, 우울증 위험은 1.5배라고 적었습니다. 베이징대 공중위생학원은 이런 상태에 ‘대리 양육 피로 증후군’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사랑에도 의학적 이름이 붙는 시대가, 지금 우리 눈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출산율 0.72의 한국, 1.0의 중국이라는 배경을 빼놓고는 이 이야기를 온전히 할 수 없습니다. 맞벌이가 필수가 된 시대에, 조부모는 어느새 가족의 마지막 안전망이자 동시에 가장 조용히 소모되는 자원이 되었습니다. 중국가정추적조사(CFPS) 분석에 따르면 격대 돌봄이 가능한 여성의 재출산율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5.6~5.8%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저는 이 숫자를 보며, 저출산 정책의 성패가 실은 젊은 부모가 아니라 그 옆에 선 조부모의 건강과 여력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면서 서울시 한 자치구 복지관 실무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부모 돌봄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어요. 부모도 아니고 기관도 아닌, 그 중간에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노동이거든요.” 이 말은 제가 챕터에 옮겨 적은 한 문장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격대교육은 통계에도, 제도에도 온전히 잡히지 않는 그림자 노동이다.” 저는 그 문장을 다시 읽으며,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노동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고 정작 그 무게는 헤아리지 않아 왔는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정책의 온도 차이도 뚜렷합니다. 한국은 일부 지자체가 조부모 돌봄수당 시범사업을 운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반면, 중국은 국가위생건강위원회 주도로 3세 미만 영유아를 위한 托育(공공 보육) 시설을 대도시 중심으로 빠르게 늘려 조부모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통계청과 국가통계국 자료를 나란히 놓고 보면, 두 나라 모두 최근 5년 사이 조부모 돌봄 의존도가 오히려 소폭 상승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속도로, 가족은 이미 그 부담을 조용히 떠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이 챕터를 쓰며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격대교육은 지금 ‘선택’입니까, 아니면 ‘의무’입니까. 그리고 그 손주를 안은 손이, 며칠째 저리지는 않으십니까. 한국의 황혼육아 지원법이나 중국의 托育 보조금처럼, 이제 이 질문에 사회가 함께 답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조부모가 희생이 아니라 선택으로 손주 앞에 앉고, 부모가 부담이 아니라 감사로 응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관계는 세 세대 모두의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함께 늙어가는 법」 제13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서울과 상하이에서 만난 조부모들의 목소리와 더 많은 통계, 그리고 실버산업이 이 문제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제언까지 함께 실었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분들은 위아북 도서 상세 페이지(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5-kr/)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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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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